닥치고 FTA가 필요한 시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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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호 30면

#장면1=1651년 3월 11일, 효종이 송시열을 독대한다. 주제는 북벌(北伐). 임금은 “하자”, 대신들은 “말자”로 대립하던 때였다. 실록에 기록된 대화의 일부를 옮긴다.
효종=“북벌은 지금 내가 않으면 아무도 안 할 것이오. 경은 동지들과 의논해 주시오.”
송시열=“…북벌을 추진하다 차질이 생겨 국가가 패망하는 재앙이 생기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효종=“북벌은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일.”
송=“주자가 이르기를 큰일을 하려면 먼저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고 했사옵니다. 먼저 전하의 마음을 닦으셔야 합니다.”
효종=“그러다가는 영영 때를 놓치고 마오.”
신하지만 북벌 반대의 영수인 송시열은 한 치도 안 물러났다. 몇 달 뒤 효종은 의문 속에 숨졌다. 영토와 경제를 북방으로 확장시키려는 임금의 비전은 좌절됐다.

#장면2=1993년 10월 21일, 빌 클린턴 행정부 초기. 미국 과학계의 꿈이 무너졌다. 10년 전부터 텍사스의 와하하치시 근교 지하에 150억 달러를 들여 87㎞의 원형터널을 뚫는 계획이 진행됐다. 터널 속에서 양성자를 충돌시켜 우주 생성원리를 찾고 입자물리학의 선두에 선다는 계획이었다. 한국에서 지금 만드는 가속기가 겨우 200m다. 그런데 사업은 폐기됐고 현장은 폐허가 됐다. 그리하여 오늘날 양자물리학의 주도권은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CERN)로 거의 영구적으로 넘어갔다.
전혀 연관성 없는 얘기 같지만 ‘잘못된 정치의 폐해’를 보여 주는 공통점이 있다. 만일 송시열이 효종을 따랐다면 오늘날 북방의 그림은 달라졌을 것이다. 연세대 사학과 김준석 교수는 “역사적으로 나라가 새로 일어나거나 중흥할 시점에 북진이나 북벌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했다.(전하! 뜻을 거두어 주소서, 가람기획)

터널 폐쇄도 문제는 민주당이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민주당은 이 사업 현장인 텍사스주의 당시 주지사 앤 리처드가 싫어 반대했다. 냉전 직후라 그런지 “미국이 그렇게 과학에 공을 들여 뭐하느냐”는 비판이 거셌다. 클린턴 대통령도 공화당 출신 전임 대통령들이 추진했던 사업이라 시큰둥했다.

과거·현재를 막론하고 위정자나 정치인의 어리석음은 흔하다. 요즘 한국에선 FTA 반대세력이 그래 보인다. FTA가 필요하다고 보는 나는 이들이 ‘터널 폐쇄’와 ‘북벌 좌절’ 사이 어딘가에 있어 보인다. ‘송시열과 조정 대신’에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야권’이 오버랩된다. “패망하면 어쩌냐”엔 투자자·국가 소송제도(ISD) 트집이, “먼저 임금이 마음을 다스리라”는 데는 ‘반(反)이명박 정서’가 연상된다.

FTA의 경제적 효과를 아무리 설명하고 “ISD 개정 협상에 나서겠다”고 대통령이 말해도 야권이 반대를 선창하고 거리에선 확대재생산되는 이유는 뭘까.
지난 8월 미국 LA 타임스에 ‘Vexed generation’이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중앙일보 김택환 미디어전문기자는 이를 ‘약 오른 세대’로 번역했다. 정치·경제적 목표를 분명히 갖지 못하고 상실감과 패배감에 젖은 세대다. 실직·구직난에 시달리다 뿔난 20대 얘기다. 그러나 요즘 한국에 오면 그 범위가 20~40대로 확 넓어질 것 같다.

김택환 기자는 “이들은 처지에 대한 분노를 표출할 손쉬운 공격 대상을 찾고, 이성적 담론보다 당장의 달콤한 얘기가 통한다”고 한다. ‘한국 정치는 감정의 수레바퀴로 돌아간다’고 한 여론전문가 서정희의 진단도 같은 맥락이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좋고 싫음만이 문제다. ‘ISD는 사법 주권 포기’라는 말에 꽂히면 FTA 협정은 나라 팔아먹는 문서일 뿐이다. ‘미국이 한국을 약탈한다’는 단문이 트위터로 확산되면 그 폭류는 감정의 수레바퀴를 맹렬하게 돌린다.

그럼에도 답은 그들에게 있다. 그들 마음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 대목에서 인터넷방송 ‘나는 꼼수다’의 김어준씨가 쓴 『닥치고 정치』라는 책의 표어가 떠오른다. 못난 정치권을 뒤집게 이번만은 ‘닥치고 정치’하자는 것이다. 분노를 집중시켜 ‘보수 골통’의 세계를 변화시키자는, 기막히게 잘 만든 조어다. ‘나는 꼼수다’의 인기와 그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점들을 고려하면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짧은 구호는 대성공을 거뒀다. 그렇다면 이번엔 그 힘을 FTA를 위해 떨치면 어떨까. 이번만은 ‘닥치고 FTA’ ‘닥치고 경제’라고 일갈했으면 좋겠다. 분노의 힘을 더 나은 미래 준비로 돌리는 데 트위터계 고수의 힘도 함께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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