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안철수가 560년 전 세종에 주목하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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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일으켜 세우겠다(施仁發政).”(세종의 즉위교서. 『세종실록』 1418년 8월 11일)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하극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이유로 백성들의 입을 막는다면 과인은 대체 백성의 소리를 어디서 들을 수 있단 말이오.”(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

 이도 세종(李? 世宗·1397~1450). 조선조 4대 군주로서 왕조의 기틀과 문치(文治)를 확립한 현군이다. 2011년 끝자락, 한국 사회에 세종 바람이 불고 있다. 대중적으로는 사극 ‘뿌리 깊은 나무’가 백성에 귀 기울이며 헌신하는 세종을 그려 인기다. 학계에선 세종의 치적과 사상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정치권과 기업에서도 세종 리더십이 화두다.

 ◆소통·인내하는 리더=“참고 기다리며 오직 인내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설득할 것이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한석규 분)은 정적(政敵)들의 반대를 소통과 인내로 돌파해간다. 시청률 20%를 넘는 인기는 대중이 희구하는 리더상(像)이 극 중 세종에 반영돼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박현모 박사는 이를 ‘시대적 유사성’으로 해석했다. 창업기 태종이 강력한 왕권정치를 특징으로 했다면, 세종은 자신의 시대를 수성(守成)기로 봤고 애민(愛民) 정치에 힘썼다. 박 박사는 “한국 사회도 건국 이후 60년간은 산업화와 민주화로 내달렸지만 지금은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요즘 세대는 눈높이로 소통하고 감동을 주는 리더십에 목말라한다”고 말했다. 드라마에서 글을 몰라 죽임을 당하는 백성을 ‘어여삐 여겨’ 글자를 만드는 세종에게서 국민의 아픈 곳을 어루만지는 통치권자를 발견하는 셈이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정치권도 세종 탐색에 나섰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정책자문을 하는 국가미래연구원(IFS·위원장 김광두 서강대 교수)은 지난달 첫 번째 출판물로 『세종대왕의 바른 정치:외천본민(畏天本民)』을 출간했다. 집필자인 숙명여대 신세돈 교수(경제학)는 “너도나도 정치개혁, 인적 쇄신을 외치는데 하늘을 경외하고 국민을 근본으로 하는 세종의 정치관은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고 말했다.

유력한 대권주자로 꼽히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세종리더십연구소와 협력하는 ‘한국형리더십연구회’에 정례멤버로 참석하고 있다. 연구회는 매달 모일 때마다 『세종실록』의 주요 어록을 화두로 얘기한다. 안 원장과 같은 대학원의 손욱 교수(전 삼성종합기술원장·농심 회장), 김영헌 포스코 미래창조아카데미 원장 등 15명 안팎의 모임이다.

 삼성그룹은 그룹 전체 리더십 교육 콘텐트로 세종리더십 도입을 추진 중이다. 지난 7월 제주도 지자체 공무원 4박5일 연수 때도 세종리더십이 활용됐다.

 ◆현대정치의 눈으로 본 세종=오피니언 리더 층에서 세종이 화두가 된 것은 세종시대에 대한 학술적 재조명과 궤를 같이한다. 2009년 조사에 따르면 세종과 한글에 관한 국내 논문은 552편인데, 2000년도 이후 급증했다는 게 특징이다. 어문·제도에 치우쳤던 연구도 인물(리더십)·행정(인사) 등으로 확장됐다. 이는 1990년대 중반 『조선왕조실록』이 현대한글로 번역되고 데이터베이스(DB)화된 데 힘입은 바 크다. 세종리더십연구소가 2005년 정치학자들을 중심으로 발족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최근 『용비어천가와 세종의 국가경영』이라는 논문모음집을 출간했다. 논문집을 총괄한 박병련 (한국학대학원) 교수는 “요즘 권력자를 상찬하는 행위를 비꼬아 ‘~비어천가’라며 조롱하지만 이는 잘못 이해한 것이다. 용비어천가엔 개국 세력의 단결과 반대 세력에 대한 포용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세종리더십을 돌아봐야 할 이유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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