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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기 소르망' 에게 듣는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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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소르망(57)은 경제학자이면서 '세계화문명론' 을 주창하는 문명비평가로 유명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기업메세나(기업의 문화예술활동 지원)협의회가 함께 개최한 '기업과 문화생활의 연대' 라는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온 그를 8일 전경련 손병두 부회장이 한시간동안 만났다.

두 사람은 21세기 한국 경제의 진로.재벌개혁.남북경협.디지털 경제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손병두 부회장:1998년 1월 방한했을 때 한국의 위기는 일시적이라고 진단했듯 한국은 2년여 만에 경제위기를 극복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이 위기를 극복하는과정을 통해 사회 전반에 걸쳐 환경이 변했다고들 하는데 어떻게 보는가.

▶기 소르망=과거 한국을 보면 정부·경제계 지도자들이 자만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외환 위기를 극복하면서 이를 반성하고 있는 것 같다.이런 점에서 한국은 ‘위기가 생산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하나는 한국이 개방적으로 변해 외국인 직접투자를 적극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르노가 한국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는 것을 보고 외국인의 시각이 많이 변했다.외국인을 배척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조금 더 세계화되었다는 것을 널리 알려 주었다.이는 앞으로 분명히 한국에 이익이 될 것이다.

또다른 주목할 큰 변화는 바로 민주화다. 민주화는 정치·사회뿐만 아니라 경제에서도 진전이 이뤄졌다. 한국인들은 그전보다 더 자신을 주장하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앞으로 경제 활성화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손=일부 논란이 있지만 재벌개혁도 상당히 진전됐다.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어떤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고 보는가?

▶기 소르망=우선 구조조정은 외환위기를 거울삼아 건전한 금융체제를 확립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둘째,재벌은 60년대에는 유용했었지만 지금은 경쟁력이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서구 사회도 재벌을 해체해 개별 사업 부분으로 특화하고 있다.

셋째,사회·문화적인 변화에 기업들이 적응해야 한다. 기업이 성공하려면 최고경영층에서 노동자까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반론이 나오면 협상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요즘 많은 미국 회사들이 금요일에는 캐주얼 차림으로 근무토록 한다.미국이나 프랑스·일본 기업에서는 경영자와 노동자 구분없이 구내식당에서 함께 식사한다.

노동자들은 사장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자신이 공동운명체라는 점을 느낀다. 경영층에서 먼저 솔선수범해 이런 변화를 보여 주어야 한다. 지도층이 먼저 변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다. 한국의 재벌도 과거 모델에 집착해서 변화를 거부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현대그룹의 구조조정과 경영권 다툼에 대해 어떻게 보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 두 사람 모두 친분 관계를 갖고 있어 대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80년대부터 정주영 전 명예회장과 김우중 회장을 만나는 등 국내 기업인과 친분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손=저서 신국부론을 보면 제3세계 국가도 자유주의 경제 모델을 채택해서 운용하면 잘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이 경제위기를 맞은 것은 자유주의 경제모델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인가.

▶기 소르망=한국 정부와 기업은 세계 경제의 흐름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제때 이해하지 못했다.경제위기가 닥친 뒤 이해할 정도로 한걸름 늦어 문제가 생긴 것이다.

▶손=한국은 그동안 많은 제도를 개혁했다.진정한 신자유주의적 경제 모델을 갖기 위해서는 제도적 개혁 뿐만 안니라 윤리·도덕·문화적인 면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시스템만 바꿔서는 한계가 있다.교통 신호등이 있어도 사람들이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기 소르망=모든 이론은 경직되고 단순하다.그래서 다른 나라가 받아들이기에 힘든 구석이 많다. 또 이론 속에는 결점이 포함돼 있다.이론으로 미래를 예측하려 했지만 대부분 실수를 범했다.

세상은 이론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나는)신자유주의적 경제모델을 갖기 위해서는 교육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다.프랑스나 한국이 어려서부터 경제교육을 더 많이 시켜야 한다.

▶손=요즘 한국의 금융노조는 지주회사를 설립하면 인원을 감축할 것이라며 파업하겠다고 대립한다.구조조정을 위한 장치 마련에 노조가 반대하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

▶기 소르망=대립은 자연스런 삶의 일부다.반드시 피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한국은 실업에 대한 사회적 장치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따라서 미국이나 영국 등 외국과 다른 점이 많다.

서구 국가는 해고가 쉽다. 사회보장 장치로서 실업보험 등이 충분히 마련돼 있기 때문에 보다 탄력적이다. 한국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이같은 사회안전망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이를 보완하는데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손=한국은 인터넷 보급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빨라 관련 산업이 뻗어나고 있다.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빈부격차가 더 커질 것으로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기 소르망=한국은 인터넷에서 정말 앞서 가고 있다.‘디지털 민족’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다.인터넷은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긍정적이다.세계 어디서나 정보 접근이 용이하고 비용도 싸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싸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기름을 싸게 구입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도약하는데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 등 일부에서 제기된 인터넷 시대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인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디지털 격차)’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엘 고어 부통령이 자신의 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신조어다.

인터넷은 부자나라나 가난한 나라나 접속이 가능하다.그런 의미에서 인터넷은 매우 중립적이고 공평하다.인도의 가난한 농부도 인터넷을 통해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해 파종 시기와 종자 가격 등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인터넷은 세계 경제를 개선하는데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손=지난달 남북정상회담 대표단에 포함돼 북한에 다녀왔다.남북 문제에 대해 비관적인 견견해를 갖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최근 남북한은 정상회담 이후 경제협력을 촉진하고 평화공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 소르망=나는 북한에 대해 부정적이라기 보다 신중한 것이다. 그 이유는 북한이 아직도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과 회담할 때에는 상대방이 결정권을 갖고 있는지도 모를 때가 많다.

남북한의 목표가 다르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남한은 점진적으로 연착륙을 통해 통일이 되기를 원한다.하지만 북한이 원하는 것은 오직 체제 유지다.

북한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양보하거나 협상할 용의가 있다. 필요하다면 남한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려고 한다.

북한은 통일을 원하지만 미군 때문에 안된다는 식의 주장이 그런 것이다. 정부나 기업이 북한을 대할 때에는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손=한국의 또다른 문제는 교육이다. 산업화에 따라 가족이 핵가족화하고 이혼율이 증가하면서 결손 가정도 늘었다.청소년 문제는 가정과 학교의 불균형과 전통적 가치의 붕괴 등이 원인으로 지적된다.학교와 가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 있는가.

▶기 소르망=한국 뿐만 아니라 서구사회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프랑스에서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장래 희망을 물었더니 ‘부자가 되기 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가장 많았다.
사회는 스스로 재구성된다.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부 학자들은 사회는 싸이클이 있는데 지금의 미국은 새로운 사회가 구성되는 시작 단계라고 본다.

핵가족과 개인주의로 대변되는 분할에서 다시 대가족과 집단주의로 통합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전통적 사회가 무너진 뒤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말이 맞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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