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병상의 시시각각

발랄한 원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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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박원순 후보가 시장에 당선된 뒤 서울시 직원들은 취임식을 위해 세종문화회관 대관을 알아봤다. 박 시장이 “필요 없다”며 직원들을 불렀다. 뉴미디어담당, 홈페이지 담당, 시민소통과 직원 등. 박 시장은 인터넷 취임식 아이디어를 내고 직원들과 다섯 차례 기획회의를 함께했다. 본인이 주연한 54분짜리 다큐멘터리 같은 취임식 동영상이 만들어졌다.

 서울시는 취임식 비용 한 푼 들이지 않았다. 오세훈 시장의 경우 지난해 세종문화회관 취임식에 3592만원을 썼다. 인터넷 중계에 돈 쓸 필요도 없었다. 네이버 같은 포털은 물론 각종 인터넷 뉴스사이트들이 앞다투어 중계를 자청했다. 홍보와 광고비 한 푼 안 들이고 국내 주요 사이트 모두에 걸렸다. 수십만 명이 구경한 것으로 추정된다. 16일 사이버 동네의 화제가 됐다. 칭찬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타고 흘러 넘쳤다.

 동영상은 잘 짜였다. 크게 다섯 파트. 처음 3분30초는 ‘시장에게 바란다’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옴니버스로 묶은 인트로. 이어 18분은 박 시장이 최초로 시장실 내부를 공개하는 훔쳐보기. 본론인 취임식은 시장집무실에 선 채로 10분. 후반은 중계를 본 시민들의 반응을 인터넷과 SNS로 받아 박 시장이 읽어주는 실시간 쌍방커뮤니케이션. 마지막은 오프라인 하객을 만나러 덕수궁으로 나가는 번개 이벤트.

 흥행에 성공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재미다. 사이버 세상에선 재미 없이 살아남을 수 없다. 재미는 파격(破格)에서 나온다. 서울시장이라는 자리에 60년간 켜켜이 쌓여온 권위주의가 한순간에 깨져나간다. 형식이 기발하니 궁금증부터 자아낸다. 시장실은 물론 욕실·침실이 붙은 내실(內室)까지 속속들이 보여주니 훔쳐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금단의 공간을 까발린다는 쾌감에,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진정성까지. 디테일도 살아 있다. 몰래카메라 형식으로 집무실 내부를 며칠간 찍은 동영상을 빨리 돌리는 코믹, 마지막에 영화 자막처럼 크레딧이 올라가며 신나는 음악이 깔리는 엔딩.

 보는 사람들이 재미를 얻었다면, 박 시장은 엄청난 정치 캠페인 효과를 거뒀다. 보는 사람이 웃고 즐기는 사이 박 시장은 자신의 시정철학을 반복 주입시켰다. 혼자 내레이션을 하며 집무실을 소개하던 박 시장은 책장과 책상, 의자와 벽보, 재활용 이면지까지 하나씩 들춰가며 그 속에 담긴 정치적 메시지를 정확히 던졌다. 기울어진 책장은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나타내고, 벽보판(시민의 소리)에 붙은 포스트잇은 시장을 감시하는 시민의 눈이며, 책장 위 보도블록은 청산해야 할 예산낭비의 상징이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상징을 이용한 캠페인이기에 설득력을 더한다. 거부감 없이 박 시장의 논리에 빠져들게 된다. 자신이 NGO 시절 일본 지하철을 연구해 만들었다는 보고서 파일을 꺼내 사진을 하나씩 보여주면서 “일본 지하철처럼 안전한 서울 지하철을 만들겠다”고 말한다. 지하철을 이용해본 사람은 빨강 비상버튼에 작은 감동을 느낀다. “지하철 관계자를 아직 못 만나 아이디어를 주지 못했다”는 시장의 말은, 보는 사람에게 감정이입(感情移入)돼 “빨리 만나야 하는데…”라는 조바심까지 갖게 만든다.

 소통의 성공요건을 모두 갖췄다. 재미에 진정성, 그리고 일관되게 파고드는 메시지. 결론은 공감이다. 이런 파격은 시장 본인이 결심해야 가능하다. 시장에게 이런 파격을 요구할 수 있는 공무원은 없다. 박 시장은 내레이션을 하면서 본능적으로 어색한지 계속 중얼거린다. “이런 거 처음 해봐서” “아까 적어준 거 어디 갔지” 등등. 그러면서도 두 팔을 벌려 하트(Heart) 모양을 만들며 “사랑합니다”라고 외친다. 늙수그레한 시골 교장 같은 박 시장은 애써 발랄하다. 소통을 알기 때문이다.

 진보의 소통 방식은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다. 인터넷 취임식은 청춘콘서트보다 진화했다. 소통한다면서 실언을 남발하고 조롱거리가 되는 불통(不通) 보수는 배워야 한다. 곧 대학생들과의 대화에 나서겠다는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박근혜식 소통’이 기대된다.

오병상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