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비준 진통] 민주당 끝없는 “안돼 안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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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하기 하루 전인 14일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임태희 대통령실장과 만나 “(대통령이) 빈손으로 오면 빈손으로 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이 대통령은 15일 국회 방문 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투자자·국가 소송제도(ISD)와 관련해 ‘선(先) 비준, 후(後) 3개월 내 재협상’이란 선물 꾸러미를 내밀었다. 민주당이 그간 ‘선 ISD 재협상, 후 FTA 비준’을 집요하게 요구해 온 만큼 이 대통령으로선 민주당 요구 사항의 절반은 들어준 셈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제안에 즉답을 하지 않고 하루 동안 시간을 번 민주당이 16일 내린 결론은 또다시 ‘노(No)’였다.

 민주당은 이날 의원총회에서 ‘국회가 FTA를 비준하기 전 ISD의 폐기·유보를 위한 재협상을 즉시 시작하겠다’는 한·미 양국 장관급 이상의 서면합의서를 청와대에 요구하기로 했다. 국회 비준 전 ISD 폐기를 위한 재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종전 입장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용섭 대변인은 “비준안 발효 후 3개월 이내 ISD를 재협상한다는 이 대통령의 구두 약속은 당론 변경 사유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의총 직전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이 대통령의 ‘3개월 내 재협상’ 제안을 수용한다는 공식 입장까지 내놨다. 미 무역대표부(USTR) 당국자는 “미 정부는 한·미 FTA가 발효되면 한국 측이 제기하는 어떤 이슈에 대해서도 한국과 협의(consult)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미 정부가 ISD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것은 처음이다.

 민주당은 그동안 “이 대통령이 프랑스 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 ISD 재협상에 대한 확답을 받아 와야 한다”(지난 3일 김진표 원내대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오바마 대통령 만나면 새로운 대안을 갖고 와야 한다”(11일 이용섭 대변인)고 요구해 왔다.

 이에 이 대통령이 ISD 재협상안을 내놓고, 미 정부도 이를 수용했는데 민주당은 이번엔 ‘문서’로 보장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것도 기존 당론(‘선 ISD 재협상, 후 비준’)을 고수하면서 말이다. 한나라당 김기현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민주당이 서면합의서를 받아 오라고 하는데, 이 요구는 대통령에 대한 결례를 넘어 모욕에 가까운 것”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당 의총은 지난달 31일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김진표 원내대표 간의 FTA 합의안(선 비준 후 ISD 재협상)을 뒤집은 적이 있다.

 지난 5월 당시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에게 합의해 줬던 한·EU FTA 비준안도 민주당 의총에 와서 ‘노’ 판정을 받고 번복됐다.

이날 의원총회에서 일부 민주당 의원은 왜 민주당이 FTA를 결사 저지하는지 속내를 드러냈다.

 의총장을 나서던 한 민주당 의원은 “정동영 최고위원이 ‘ISD 폐기 당론을 유지해야 야권통합이 된다’는 발언을 하더라”고 소개한 것이다.

 마침 ‘피해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현재의 FTA’를 반대하는 한국노총(위원장 이용득)은 16일 저녁 민주당이 추진하는 야권 통합신당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민노당을 포함한 노동계가 민주당을 둘러싸게 된 셈이다.

 민주당이 이 대통령 제안에 대해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힘에 따라 한나라당은 단독 강행 처리에 무게를 실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김정권 사무총장은 민주당 의총 후 “단독 처리 수순으로 갈 거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준비를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17일 오후 의총을 열어 단독 처리 방안을 포함한 대책을 논의한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신용호·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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