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미국인 근로자들 “노조보다 일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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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한은화
경제부문 기자

“노조 설립에 동의하세요.”(미국자동차노동조합 간부) “….”(현대자동차 미국 앨라배마 공장 근로자)

 올 1월 전미자동차노동조합(UAW) 사람들이 미국 앨라배마주 현대차 근로자의 집을 일일이 방문했을 때 벌어진 풍경이다. 최근 미국에 있는 외국계 자동차 공장의 노조 설립을 강하게 추진하고 있는 UAW가 현대차에도 압력을 넣은 것이다. 근로자들에게 일일이 노조 설립 동의를 구했으나 반응은 시큰둥했다. 결국 UAW는 빈손으로 돌아갔다.

 현지 공장 고위 관계자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물음표가 크게 그려졌다. 근로자들이 좋은 근무환경에 노조 설립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걸까. 지난 7~8일(현지시간) 방문한 현대(앨라배마)·기아(조지아)차 생산공장은 24시간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조지아 공장의 경우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2교대 근무에서 24시간 근무할 수 있는 3교대로 늘릴 정도였다. 급여도 도요타·포드 등 인근 다른 자동차 회사보다 낮은 데도 말이다.

 현장에서 만난 근로자들은 “일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현대차 공장 조립라인에서 근무하는 재로드 잭슨은 “일하는 시간이 늘었지만 결국 회사와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라며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뭐든 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처럼 현지 근로자들이 한목소리로 ‘일자리’를 외치고 있는 데는 오랜 ‘상실의 시대’를 겪어 봐서다. 현대·기아차 공장이 있는 남부지역은 예전에 목화산업으로 번성했었다. 그러나 신흥시장에 해당 산업의 주도권을 뺏긴 후 심각한 실업난을 겪었다. 2009년 GM·크라이슬러가 파산보호를 신청한 것도 이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으로 각인됐다. ‘어렵더라도 일하는 게 낫다’는 의식전환이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다.

 미국 현대·기아차 공장에서 보듯, 노사 한쪽이 죽는다면 다른 한쪽은 살 수 없다. 노사가 힘을 합쳐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일자리를 지키는 게 최선책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노사 관계는 생산성 향상보다는 일자리 지키기에만 급급한 분위기다. 미국에서 만난 한 근로자는 “(한국 노조는) 바뀌어야 할 정도를 넘어섰다. 그러다가는 다 죽는다”고 말했다. 파업을 여러 번 경험한 그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한은화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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