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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환영의 시시각각

건강한 의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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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김환영
중앙SUNDAY 국제
지식에디터

신뢰라는 가치에는 많은 장점이 있다. 정치나 경제는 신뢰가 용이하게 하는 예측 가능성, 공동체의 안정성, 협업 덕분에 순탄하게 운영될 수 있다. 신뢰지상주의자들은 신뢰 없이는 아무것도 이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치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신뢰 수준이 높아야 번영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신뢰에 대한 높은 관심에 비추어보면 의심은 푸대접받고 있다. 그러나 ‘신뢰 예찬(禮讚)’ 못지않게 의심 예찬도 가능하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확신의 끝은 의심, 의심의 끝은 확신”이라고 단언했다. 괴테는 “의심은 지식과 함께 성장한다”고 관찰했다.

 건강한 의심에는 힘이 있다. 의심과 불신은 비슷하게 보이지만 다르다. 의심은 신뢰와 불신 사이에 있는 중용·중도다. 의심에는 신뢰와 불신이 섞여 있다. 합리적 의심, 이유 있는 의심은 맹목적 신뢰와 불신을 동시에 견제한다. 의심이 건강하려면 독자성을 확보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의심은 민주주의와 과학과 결합돼 있다. 의심은 정치와 과학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혁신할 수 있는 도구다. 과학에서는 아무리 확고히 자리 잡은 석학의 학설이라도 의심으로 무장한 신출내기 과학자가 허물어뜨릴 수 있다. 과학자는 확실한 지식도 의심해 ‘방법론적 무지’에 빠진 다음 전혀 새로운 지식을 창출한다. 일인·일당 독재에서 ‘백성·신민(臣民)’은 한 사람, 한 정당을 무한히 신뢰하면 된다. 독재체제에는 ‘찬성을 위한 찬성’ ‘신뢰를 위한 신뢰’가 지배한다. 민주주의는 ‘반대를 위한 반대’ ‘의심을 위한 의심’에도 가치를 부여한다. 민주정치에서 여당과 야당은 서로의 정책에 대해 의심해야 한다.

 우리 정치에서도 건강한 의심이 절실하다. 정치인들, 대권주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의심, 능력에 대한 의심이 끊임없이 제기돼야 한다. 여야의 선두 후보들을 마치 대한민국을 구원할 메시아로 기대하는 심리도 의심해야 한다. ‘누구는 이래서 된다, 안 된다’에 대해서도 의심해야 한다. 정당의 환골탈태, 당명 개명, 대폭 물갈이가 좋은지에 대해서도, 야권 대통합의 방식이나 대통합 자체가 좋다·나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의심해야 한다.

 의심은 그 자체로서 존재 의미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신뢰와 결합할 때 힘이 배가된다. 의심은 더 큰 신뢰나 진리를 낳기 위한 중간 단계가 될 수 있다. 영원히 의심만 할 수는 없다. 의심에서는 행동이 나오기 힘들다. 행동은 신뢰에서 나온다. 의심은 신뢰를 보완할 수 있지만 대체할 수는 없다. 기독교·불교 등 종교에서도 의심을 어느 정도 용인하지만 의심을 궁극에 이르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의심하는 도마(doubting Thomas)’는 궁극적으로 ‘믿는 자 도마(Thomas the Believer)’가 돼야 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국민 경제에 미칠 효과에 대해 신뢰하는 사람들과 의심하는 사람들과 불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은 FTA에 대한 불신과 의심이 결합돼 있다. FTA에 대한 신뢰와 의심이 결합되는 게 더 타당하다. 역사 속에서 불신·의심·신뢰는 끊임없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문다. 불신·의심·신뢰 모두 다 필요하다. 체제에 대한 불신에서 혁명이, 의심에서 개량이, 신뢰에서 안정이 나온다. 민주주의·시장경제마저 의심을 넘어 불신의 대상이 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자유무역에 대해서는 이미 미국 민주당·공화당 모두 의심을 넘어 불신이 표출하고 있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를 말한 지 34년이 됐다. 확실성의 시대는 신뢰의 시대, 불확실성의 시대는 의심의 시대다. 불확실성의 시대는 새로운 대안이 떠오른 혁명의 시대, 구체제가 불신의 대상이 되는 시대는 아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자유무역은 건재하다. 신뢰·의심의 대상이지 불신의 대상은 아니다.

 국가경쟁력은 한 사회의 신뢰뿐만 아니라 의심의 건강성으로 결판난다. 건강한 의심은, 독자성을 확보하고 불신이 아니라 신뢰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의심이다.

김환영 중앙SUNDAY 국제·지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