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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인 ‘낫 모양 적혈구’ 말라리아에 안 걸리는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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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1944년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 연안 국가 감비아. 이곳 군병원에서 병리학자로 일하던 윈스턴 에번스 박사는 현지 주민 600명의 혈액을 분석했다. 무서운 말라리아 모기에 물려도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 그 비밀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조사 대상의 20% 정도가 ‘겸상(鎌狀·낫 모양) 적혈구 빈혈증(sickle-cell anemia)’ 유전자를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 번도 말라리아에 걸린 적이 없거나 걸리더라도 경미하게 앓고 완치됐다는 것이다.

낫 모양 적혈구 속 빈혈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말라리아를 막는 데 모종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었다. 이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아프리카에서도 지역에 따라 10~40% 정도 존재하는 것으로 이후 조사에서 밝혀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빈혈증 유전자가 어떻게 해서 말라리아에 ‘저항성’을 제공하는지는 이후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독일 하이델베르그대학 연구팀이 10일(현지시간) 국제과학저널인 사이언스에 게재한 논문에서 67년 동안 이어졌던 미스터리를 풀어냈다.

 사이언스에 따르면 빈혈증 유전자를 가진 사람의 적혈구는 둥글고 납작한 모양이 아니라 풀을 베는 낫처럼 길쭉한 형태가 되고, 결국 쉽게 파괴된다는 것이다. 이는 적혈구에서 산소를 수송하는 헤모글로빈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DNA에 돌연변이가 생기면서 헤모글로빈 단백질의 여섯 번째 아미노산이 물과 잘 섞이지 않는 발린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로 인해 헤모글로빈끼리 서로 엉겨붙으면서 적혈구 모양도 낫처럼 바뀌게 됐다.

 이번에 밝혀진 것은 말라리아 원충(原蟲)이 적혈구에 침입해 ‘어드헤신(adhesin)’이란 단백질을 만들고, 이 단백질을 소포체(세포 내 작은 주머니)에 담아 적혈구 표면으로 내보낸다는 점이다. 혈구 표면에 모인 어드헤신은 적혈구 표면을 끈적끈적하게 만들어 혈액 속의 적혈구끼리 서로 달라붙고 엉기게 만든다. 이렇게 해서 말라리아의 전형적 증세인 모세혈관 염증이 나타난다. 이때 원충은 ‘액틴(actin)’이란 적혈구의 단백질을 활용한다. 액틴을 가늘고 긴 실 모양으로 연결시킨 뒤 이를 어드헤신을 수송하는 세포 내 ‘교량(bridge)’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반면에 낫 모양의 적혈구에서는 말라리아가 액틴을 활용하지 못해 어드헤신을 적혈구 표면으로 보내지 못했다. 연구팀은 “말라리아 원충이 액틴을 찾아내야 하는데 돌연변이 헤모글로빈이 이를 방해하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2009년 지구촌 인구 중 78만 명이 말라리아로 숨졌다. 세계 각국은 말라리아 퇴치를 위해 모기장을 보급하고 백신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강찬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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