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기다리는 전략에서 전술적 관리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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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둘러싸고 미국 ‘때리기(bashing)’가 도를 더해 가고 있다. 이를 보고 지난주 서울을 방문한 미국 친구가 뼈 있는 농담을 했다. 미국이 ‘아예 없는(nothing)’ 줄 알았는데 아직 ‘실종(missing)’되지 않은 모양이라는 것이다. 언뜻 이해가 안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미·북 관계를 관찰해온 그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미국의 대북정책이 한국에 하이재킹(납치)당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눈에 미국의 대북정책은 실종되었거나 아예 없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미국의 대북정책에 전환점이 온 것 같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왜냐하면 ‘동란기(動亂期)’에 빠져 있는 한반도 정세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남북은 지금 도발과 응징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로의 동기나 의중을 파악할 자리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 보니 협상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할 공통의 언어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냉전기 남북관계의 재판이다.

 하지만 지금은 냉전기와는 차원이 다른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 핵에 의한 민족 절멸의 위기다. 이 핵 공포에서 남과 북은 어느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서로 손을 떨고 있다. 하지만 손을 떨고 있으면서도 이 공포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것이 제네바에서 있은 제2차 북·미 대화 이후 새로이 제기되고 있는 질문이다. 미국은 돌발사태를 막기 위해 북한과의 대화가 절실하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또 북한의 유연해진 움직임에서 대화도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대북(對北)팀을 대화파로 일신했다.

 지난주 ‘포린 폴리시’에 실린 이 대북팀의 면면이 흥미롭다. 특히 글린 데이비스 대북정책 특별대표에 관한 기사가 우리 눈길을 끈다. 그는 국무부 동아시아 수석 부차관보 시절 내부 e-메일을 통해 “억압적인 북한 정권”이란 표현에서 ‘억압적’이란 용어를 삭제하고 ‘정권(regime)’ 대신 ‘정부(government)’란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와 더불어 6자회담 대표로 기용된 클리퍼드 하트나 정부 내의 대북정책을 조정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한반도 부장인 세일러 모두 대화파에 속한다. 이들을 총지휘하는 국무부 정무차관 웬디 셔먼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녀는 1998년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페리 프로세스의 정부 부처 간 정책조정을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2000년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북한 방문을 실현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왜 ‘데이비스 신체제’일까. 존스홉킨스 대학의 조엘 위트는 예측불허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전술적 관리(tactical management)’의 포석으로 보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5년 후 북한이 제2의 파키스탄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내년에 또다시 핵이나 미사일 실험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오바마의 재선가도에 먹구름이 드리울지 모른다. 어떤 형태로든 이런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한 대화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있다.

 이에 발맞추듯 우리 정부의 대북 자세도 다소 유연해지는 느낌이다. 류우익 통일부 장관의 취임을 계기로 이런 유연성은 어느 정도 예견되었다. 지난주 미국을 방문한 류우익 장관의 발언에서 이런 움직임이 보다 구체화되는 느낌이다. 류 장관은 “남북한 긴장완화를 위해 북한과 안정적인 대화채널을 확보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라고 밝혔다. 또 “유엔을 통한 정부 차원의 대북 인도적 지원을 적극 검토하겠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지난해 5·24조치 이후 중단된 남북 접촉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제기하는 듯한 느낌이다.

 우리의 ‘기다리는’ 전략이 북한에 어느 정도 ‘학습’ 효과를 가져다준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북한의 변화를 ‘강제’하는 데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불필요하게 한·중 전략관계를 손상시키고 신냉전의 먹구름을 한반도에 몰고 왔다. 이제 북한을 둘러싼 온갖 문제는 접촉과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북한이 전향적인 자세로 나올 수 있도록 압력과 설득의 전방위 외교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를 위해 이제는 우리의 기다리는 전략이 미국의 전술적 관리에 하이재킹당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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