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부도 코앞 정쟁 … EU, 구제금융 회의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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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이탈리아에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5일(현지시간) 수도 로마에서 벌어졌다. 시위 참가자가 좌변기가 붙은 피켓을 들고 있다. 좌변기 안에는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사진과 함께 ‘임기 만료(SCADUTO)’라는 뜻의 이탈리아어가 적혀 있다. [로마 AP=연합뉴스]

국가 부도 위기 속에서도 그리스와 이탈리아 정치권이 정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이 총체적인 위기를 헤쳐나갈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두 나라 경제는 더욱 심각한 위기에 몰리고 있다.

 그리스에서는 여야가 위기 탈출 해법을 놓고 동상이몽(同床異夢)에 빠져 있다. 다음 달 15일까지 유럽연합(EU)이 주기로 했다가 정정 불안을 이유로 일시 보류한 80억 유로의 구제금융 지원을 받지 못하면 빚을 갚지 못해 국가 부도가 불가피함에도 정치권이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이 6일 보도했다.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7개 국가) 정상들은 최근 그리스에 1300억 유로(약 200조원)의 구제금융을 추가 지원하기로 했으나 그리스가 정쟁에 휩쓸리자 유럽 내에서 지원에 대한 회의론이 커지고 있다. <관계기사 e4면>

 지난 4일 가까스로 의회 불신임 투표에서 살아남은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는 5일 “여야 연정만이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고 국제 구제금융을 지원받을 수 있는 방안”이라고 강조했다. 국가 부도 위기 상황에서 여야가 거국내각을 만들어 위기에 하나로 대응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연정 합의안이 나오면 사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제1 야당인 신민당의 안토니오 사마라스 당수는 “파판드레우 총리는 지난 2년간 정치적·경제적 위기를 조장한 만큼 즉각 사임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고 맞받았다. 파판드레우는 “조기 총선은 재앙이 될 것”이라며 “정쟁으로 인해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아 있길 원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고 반박했다.

파판드레우

 그리스 정치권이 정쟁에 휩싸이자 그리스 내에서 국가가 파산하고 유로존에서 추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택시기사인 타소스 파고니스는 로이터통신에 “유럽인들은 그리스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며 “그들은 우리를 유로존에서 내쫓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는 2년여 전 경제 위기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서 초안을 받았으나 이를 부정했다고 뉴욕 타임스(NYT)가 5일 전했다. IMF는 2009년 중순 ‘그리스 경제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돼 언젠가 디폴트(채무 지불 정지) 사태에 빠져 전 유럽 경제를 재앙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보고서 초안을 만들었다. 그리스 관리들은 이 초안을 보고 IMF에 항의해 경고 수준을 낮추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5개월 후 파판드레우는 “전임 정권에서 한 해 예산 적자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12%인데도 6%에 불과하다고 거짓말했다”고 밝히며 경제 위기의 심각성을 드러냈다.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재정 위기에 시달리는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서는 야당 지지자 수만 명이 5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제1 야당인 민주당의 피에르 루이기 베르사니 당수는 이날 시위에서 “중도 성향 정당들과 함께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 국정 운영의 책임을 맡을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재정 위기와 중도우파 연정 내부의 균열로 갈수록 권력 장악력이 떨어지고 있다. GDP의 120%에 달하는 공공부채로 인해 최근 몇 달 동안 외자 차입 금리가 지속적으로 상승해 재정에 막대한 부담이 되고 있다. 줄리오 트레몬티 경제장관도 베를루스코니의 지도력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등 연정 내에서도 총리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베를루스코니는 야당의 사임 요구를 일축하고 “계속 싸워나갈 것”이라며 총리직에서 사임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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