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동반성장위의 모호한 기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2면

손해용
경제부문 기자

지난 주말 동반성장위원회는 2차 중소기업 적합 업종을 발표했다. 그런데 1차 땐 안 보이던 ‘일부 사업 철수’를 들고나왔다. 1차 때도 ‘사업 축소’와 ‘확장 자제’라며 구분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표현을 하더니 한술 더 뜬 셈이다. 기자들이 “도대체 뭔 차이냐”고 묻자 동반위는 “대기업이 품목 중 일부를 시장에서 철수하면 ‘일부 사업 철수’이고, 생산량을 줄이면 ‘사업 축소’”라는 아리송한 답변을 내놓았다.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요구하자 동반위는 “세부적으로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기자회견장에서 밝히기가 곤란하다”며 슬쩍 넘어갔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들 용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이뿐 아니다. “동반위의 강제조정 권고 없이 자율적으로 합의된 품목이 몇 건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엔 동반위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몇 건인지를 밝히면 갈등이 큰 품목이 드러나기 때문”이란 게 동반위의 해명이다. 하지만 속내는 애초 취지인 ‘자율 합의’가 퇴색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것이란 지적이 많다. 실제 동반위는 자율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한 레미콘·LED 등에 대해서는 강제적 성격의 권고를 내린 것으로 확인됐다. 한 LED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중소기업이 자율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동반성장 선언문까지 발표했는데 이게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동반위의 이런 태도는 불신과 분란의 후유증을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이왕 기업의 사업 영역을 정하기로 했으면 경계선이 명확해야 한다. 하지만 동반위가 이 기준을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리면서 되레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유리한 쪽으로 해석할 소지를 남겼다. 게다가 동반위가 직권으로 ‘권고’의 칼을 휘둘렀다는 점도 시빗거리가 될 전망이다. 동반위가 민간기구로 출범한 이유가 바로 2006년 폐기된 중소기업 고유 업종을 다시 법적으로 강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동반위는 내년 3월 대기업들의 동반성장지수를 발표한다. 이번 중기 적합 업종 발표보다 훨씬 파급력이 큰 과제다. 그때도 모호한 기준과 얼버무리기로 넘어가려 들까 걱정이다. 벌써 레미콘 등 일부 업종은 선정 기준이 모호하다며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손해용 경제부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