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무지개 연정’ 벨기에 무정부 상태 512일째 “아무 문제 없어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파리 북역을 출발한 고속열차 탈리스 9317호. 프랑스 북동부 평원을 가로질러 시속 300㎞의 속도로 미끄러지듯 달린다. 1시간22분만에 도착한 브뤼셀 남역. 신문 하나를 꼼꼼히 보기에도 모자라는 시간이다. 국경을 넘은 기억이 없다. 여권을 보자는 사람도 없다. 자동으로 로밍되는 스마트폰에 뜬 문자가 월경(越境)을 일깨워줄 뿐이다. 위급상황 시 영사 콜센터로 전화하라는 외교부의 안내 메시지와 데이터 통신 폭탄 요금에 주의하라는 통신사의 경고 메시지. 국경 없는 유럽을 실감한다.

 낙엽 쌓인 늦가을의 브뤼셀 거리는 한적하고 평온하다. 혼잡하고 시끄러운 파리와는 대조적이다.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분노한 사람들’이 금융자본의 탐욕과 부패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던 곳은 관광객들 차지가 됐다. 그리스 총리의 느닷없는 국민투표 제안으로 비상이 걸렸던 유럽연합(EU) 집행위 본부도 외견상 평온을 되찾았다. ‘무정부’ 국가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의 표정이다.

 지금 벨기에에는 정부가 없다. 512일째다. 지난해 6월 13일 총선을 치렀지만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정당 간 협상이 아직까지도 최종 타결이 안 되고 있다. 못사는 남부 왈로니아(프랑스어권)와 잘사는 북부 플레미시(네덜란드어권)의 지역 간 반목과 대립이 배경에 깔려 있다. 지역과 노선을 기반으로 정당이 난립하다 보니 선거 결과는 언제나 칠분팔열(七分八裂)이다. ‘무지개 연정’은 벨기에 정치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러나 브뤼셀 어디서도 아나키즘의 무질서와 혼란은 찾아볼 수 없다. 모든 공공 행정과 서비스는 정상이다. 대중교통은 차질 없이 운행되고 있고, 경찰차와 청소차는 분주히 거리를 오가고 있다. 시내 생캉트네르 공원에서 조깅을 하고 있던 폴 제레미(49)는 “아무 문제 없다”며 “정치인들이 서로 싸우는 꼴 안 보니 오히려 좋다”고 말했다. 시민 생활과 관련한 일상 업무는 지방정부와 각 지자체가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연방정부가 없어도 별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공무원들이 제자리를 지키는 한 나라가 혼란에 빠질 걱정은 없다는 얘기다.

 정책 연합을 통한 연정이 불가피한 구조이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책 변경의 여지가 크지 않은 것이 벨기에 정치의 특징이다. 내각책임제 덕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회가 성숙되고 안정돼 있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다.

 노자는 있는 듯 없는 듯한 ‘무위(無爲)의 정치’가 최상의 정치라고 했다. 정권이 바뀌면 마치 세상이 뒤집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완전히 새로운 정책으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유위(有爲)의 정치’다. 국민을 위해 정치가 있는 것이지 정치를 위해 국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까지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바탕 난리굿을 피워야 하는 것일까. 정부 없이 잘 굴러가는 나라도 있는데…. <브뤼셀에서>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 [분수대] 더 보기
▶ [한·영 대역]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