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42) 마오, 광산노조 파업 명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뒤로 빠진 리리싼 대신 파업을 주도하는 류사오치. 몽골족 화가 허우이민(侯一民)이 안위안 탄광 파업 참가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1960년에 완성한 ‘류사오치 동지와 안위안 광부(少奇同志和安源鑛工)’. 중국혁명박물관소장. [김명호 제공]

안위안(安源)에 도착한 리리싼은 노동조합에 해당하는 공회(工會) 설립에 착수했다. 1940년 리리싼이 소련에서 작성한 자술서에 의하면 안위안 탄광 광부들의 임금제도는 명(明)대 방직업자들의 포공제(包工制)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하루에 12시간 내지 14시간 노동했다. 광산관리국이 하루에 50전씩 매월 15원을 노무공급 청부업자인 포공두(包工頭)에게 결제하면 포공두는 광부들에게 5원을 지급하고 나머지를 가로챘다.”

비적이나 다름없는 지역의 비밀결사도 광부들을 착취했다. 아편판매와 도박장을 운영하는 비밀결사 두목은 광부들을 강제로 결사에 가입하게 하고 회비를 징수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광부들 거의가 비밀결사 회원이었다. 결사의 두목은 광산 관리국, 경찰국과 한통속이 되어 광부들을 장악했다.

리리싼은 세 가지 방법으로 광부들에게 접근했다. 합법 기구였던 평민교육회의 도움으로 평민소학을 개설하고 밤마다 학생들의 집을 방문했다. 성인들을 위해서 연 야학(夜學)도 반응이 좋았다. 몇 달이 지나자 청년단원 8명과 당원 6명을 확보, 1차 산업 노동자로 구성된 중공 최초의 당 지부를 탄생시켰다.

공인구락부(工人俱樂部)도 설립했다. 광부들은 이곳에만 오면 유희를 즐길 수 있었다. 구락부 내에 만든 공인합작사(工人合作社)는 소비조합 역할을 했다. 생활 필수품을 염가로 구입할 수 있다 보니 광부들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9개월이 지나자 회원이 700여 명으로 증가했다.

규모가 커지자 탄압이 시작됐다. 마오쩌둥은 “슬픔은 사람을 감동시킨다”며 파업을 지시했다. 리리싼은 수탉 한 마리와 술을 들고 비밀결사 두목을 찾아갔다. 두목의 입에서 “파업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칼로 닭의 목을 쳤다. 두 사람은 닭 피를 떨어뜨린 계혈주(鷄血酒)를 마시며 혈맹을 맺었다.

1922년 9월 14일, 파업을 선포하는 날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가 마오쩌둥의 서신을 들고 안위안에 나타났다. “리리싼은 비밀장소에 피신하고 류사오치가 파업과 협상을 주도하라”는 명령서였다. 리리싼은 담판이라면 몰라도 협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리리싼은 류사오치와 함께 “그간 우리는 소나 말이었다. 이제는 사람이다”라는 구호를 만들고 외딴 장소로 이동했다. 리리싼이 암살당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졌다. 곡괭이·망치·도끼로 무장한 광부 100여 명이 은신처를 에워쌌다. 리리싼은 하루에 한 번 이들 앞에 나타났다. 이때 광부들의 환호는 장관이었다고 한다.
파업이 끝나자 공인구락부 회원이 1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모든 성공과 실패, 남녀관계가 폭동 때문이었던 리리싼의 앞날을 보는 듯했다. (계속)

김명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