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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33) 아버지의 마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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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신성일이 제작하고 주연으로도 나온 영화 ‘코리안 커넥션’(1990). [중앙포토]

1989년 ‘파친코 왕’ 정덕일에게 받은 1억원으로 ‘성일시네마트’를 설립하고 창립작으로 ‘코리안 커넥션’(고영남 감독)을 선택했다. 히로뽕을 소재로 밑바닥 마약밀매조직과 공권력의 비리와 섹스, 그리고 폭력을 다뤘다. 이 영화로 90년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출발이 좋았다.

 두 번째 선택은 좋지 않았다. 그 해 만든 ‘남자시장’은 졸작으로 끝났다. 이후 파리에서 찍은 ‘물 위를 걷는 여자’(감독 박철수·1990), ‘열아홉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강우석),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정지영·1991) 등 여섯 작품을 제작했다.

 배우나 스태프들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충무로의 입방아꾼들이 배를 아파하며 나를 모함했고, 정덕일은 더 이상 자금을 대지 않았다. 92년 런던에서 홍콩 제작자와 ‘안개 속에 2분 더’를 촬영하던 중 자금이 끊겼다. 정덕일의 사무실로 찾아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달라고 했다. “신형의 자업자득이요”라는 그의 말에 큰 쇼크를 받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동부이촌동 우리 집을 모 제약회사에 담보로 잡히고 돈을 빌려 촬영을 진행했다. 작품은 완성됐지만 홍콩과 합작 계약을 잘못하는 바람에 홍콩에 판권을 빼앗겼다. 국내 상영도 제대로 못했다.

 93년 1월 9일 막내딸 수화의 결혼을 앞두고 우리 아파트가 경매가 2억원에 넘어갔다. 낙찰 받은 젊은이는 1월 7일까지 집을 비워달라는 통지를 보내왔다. 내일모레면 딸의 결혼식이었다. 나는 그를 찾아가 “일주일만 연기시켜 달라. 결혼식 치르고 이사 가겠다”고 통사정했다. 그는 절대 안 된다고 거절했다. 다시 한 번 찾아가 며칠간 말미를 얻어 결혼식을 치렀다. 비참한 아버지의 꼴이 됐다.

 63빌딩에서 JP의 주례로 결혼식을 치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차 안에서 최백호의 ‘애비’가 흘러나왔다. 마치 나를 두고 부른 노래 같았다. 집에 돌아와 텅 빈 수화의 방에 들어섰을 때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혼자 통곡을 했다. 수화가 결혼한 지 얼마 뒤 정덕진·덕일 형제의 ‘슬롯머신 사건’이 터졌다.

 95년 10월 초순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나를 청와대로 호출했다. 96년 4월 15대 총선을 앞둔 상황이었다. YS가 집권 후 경북·대구를 왕따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대구 민심은 흉흉했다. 안기부 대구 분실 임경묵 실장 측근들이 내가 대구에서 경쟁력 있는 인물이라고 보고서를 올린 것이다. 사정을 들은 엄앵란이 말했다. “좋아요, 하지만 이제 우리 각자 딴주머니 찹시다.” 그때부터 나와 엄앵란은 따로 재산을 관리했다. 숱하게 고생한 우리 부부의 고육책이었다.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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