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상 달라진 한국 그린 … 6승 박지은도 ‘KLPGA 수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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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호 19면

지난 7일 인천 스카이72골프장에서 열린 LPGA 하나은행 챔피언십 1라운드 경기 도중 박지은(왼쪽)이 박세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한국인 골퍼의 미국 진출 1호는 1988년 LPGA 투어 스탠더드 레지스터 클래식에서 우승한 구옥희(55)였다. 10년 뒤인 1998년 박세리(34·KDB산은금융그룹)가 본격적인 미국 진출의 물꼬를 튼 이후 LPGA 투어는 ‘골퍼라면 한 번은 밟아 봐야 할 꿈의 무대’로 인식됐다. 국내 여자골퍼들이 아마추어 시절을 거쳐 프로에 데뷔하면 국내에서 활동하기보다는 미국으로 떠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LPGA로 떠났던 한국 자매들 ‘U턴 러시’

하지만 3∼4년 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으로 떠났던 한국 자매들의 국내 복귀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2008년 조아람(26·하이원)과 문수영(27·웅진코웨이)이 첫 케이스였다. 2010년에는 미국 무대에서 1승씩을 거둔 홍진주(28·비씨카드)와 임성아(27·현대스위스금융그룹)가 돌아왔다. 올 시즌에는 ‘맏언니’ 정일미(39·하이마트)를 비롯해 이정연(32)·박희정(31·현대스위스금융그룹)이 귀국 행렬에 동참했다.

다음 바통을 이어받을 선수는 박지은(32)이다. 그는 KLPGA 투어 활동을 결심하고 내년 시즌 투어 카드가 걸린 시드 순위전에 응시원서를 냈다. LPGA 투어 통산 6승을 거둔 박지은은 박세리·김미현(34·KT)과 함께 트로이카로 불리며 한국 자매들의 미국 무대 활약을 이끌었던 주역이다.

2005년 부상으로 슬럼프에 빠진 그는 2009년 4월 고관절 수술에 이어 2010년 8월 허리 수술을 받았다. 지금은 부상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 달라진 골프 인생을 즐기고 있다. 이번 결정도 고국에서 새로운 골프 인생을 살면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바람에서 비롯됐다.

박지은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영어에 능숙하다 해도 타향살이는 어차피 힘들다. 시간이 갈수록 골프는 쉬워지는데 생활은 어려워진다”며 “이제 미래를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됐다. 10년 넘게 사귄 남자친구와 내년에 결혼을 하고 안정을 찾고 싶다. 한국에서 골프를 시작했으니 마무리도 여기서 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주 열린 LPGA 투어 선라이즈 대만 챔피언십을 끝내고 귀국한 박지은은 곧장 시드전이 열리는 전남 무안CC로 내려갔다. 올 시즌 LPGA 투어 성적을 인정받아 시드 1차전(11월 8~10일)을 면제받은 그는 2차전(11월 15~17일)과 본선(11월 22~25일)에 나선다.

박지은은 “골프를 시작한 뒤 시드전은 처음이다. 하지만 슬럼프를 겪으며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에 다시 도전하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하다가 안 돼 한국에 오는 걸로 비칠까 봐 반대하는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아직 미국 무대 시드도 몇 년이나 남아 있어 언제든 다시 갈 수 있다. 그보다는 고국에서 건재한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다”고 각오를 밝혔다.

이번 시드전에는 박지은 외에도 김주미(27)와 이일희(23) 등이 도전에 나선다. 2003년 KLPGA 투어 대상, 상금왕을 휩쓴 김주미는 2005년 미국으로 가 1승을 거뒀지만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슬럼프를 겪어 왔다. 2009년부터 미국과 한국 활동을 병행한 이일희는 내년부터 국내 대회에 전념한다는 계획이다.

미국으로 떠났던 선수들이 국내로 유턴하는 현상은 LPGA 투어의 환경 변화가 가장 큰 이유다. 2007년만 해도 대회 수 30개가 넘었던 LPGA 투어는 경제위기로 인해 타격을 받았고 올해는 23개까지 대회 수가 줄었다. 한국과 대만 등 아시아계가 독식하는 바람에 미국 내 TV 시청률도 떨어졌다. ‘세계 최대 투어’라는 명성도 퇴색했다.

투어 규모가 줄어들면서 상금랭킹 상위 선수를 제외하고는 상금만으로 투어 경비(1년 최소 15만 달러)를 충당하기가 힘들어졌다. 미국 진출 초기만 해도 선수마다 든든한 스폰서가 있었지만 LPGA 투어에서 활동하는 한국 선수가 30명을 훌쩍 넘어서면서 스폰서 구하기도 어려워졌다.

10년 미국 생활을 접고 올 시즌 국내로 복귀한 박희정은 “예전엔 미국에 가면 명예와 부를 얻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대회는 줄고 생활고에 쫓기다 보니 선수들끼리 모이면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미국 투어가 축소된 데 반해 한국 투어는 양적·질적으로 꾸준히 커 나가고 있는 것도 한국 자매들의 귀국을 결심하게 하는 요인이다. 2004년 미국으로 떠났다가 올 시즌 돌아온 정일미는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한 해 대회가 13개를 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 투어 개수가 미국과 비슷해졌고 상금도 많이 올랐다. 미국 투어의 매력이 떨어진 반면 한국 투어는 매력적인 무대가 됐다”고 말했다. 올해 KLPGA 대회는 20개다.

올 시즌 LPGA 투어는 23개 대회 중 6개를 아시아에서 개최하며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내년에도 아시아와 호주를 더 끌어들여 덩치를 키우려 하고 있지만 상황이 좋지만은 않다.

이런 분위기를 볼 때 국내 골프계는 한국 자매들의 귀국 행렬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KLPGA 역시 해외로 진출했던 선수들의 유턴을 반기는 분위기다. 20대 초중반의 고만고만한 선수들끼리 경쟁하던 곳에 ‘거물급 언니’들이 들어오면서 국내 여자골프가 질과 양에서 풍성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KLPGA 투어는 올 시즌 LPGA투어 상금랭킹 90위, 일본여자프로골프 투어 60위, 유럽여자투어 40위 이내 선수에게 1차 예선을 면제해 주도록 규정을 바꿨다. 지난해까지는 해외 투어에서 활동했던 선수라도 시드전 예선과 본선을 모두 치러야 했다.

KLPGA 김남진 팀장은 “그동안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도 주위의 시선, 시드전을 처음부터 봐야 하는 상황 등을 고려해 주저하는 선수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로 복귀한 선수들이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박지은 같은 대형 스타가 돌아오면서 앞으로 국내 복귀를 결심하는 선수들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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