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할 거면 부자의 연 끊자” … 혁명에 무너진 천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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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호 29면

안위안(安源)에 도착한 리리싼(가운데 오른쪽 다섯째)은 중국 최초의 공인구락부(工人俱樂部) 창설에 착수했다. 1922년 5월 1일 노동절, 구락부 주비(籌備)위원회 위원들과 함께 희미한 사진을 한장 남겼다. [김명호 제공]

리리싼(李立三·이립삼)은 프랑스 근공검학(勤工<4FED>學) 시절 마르크스와 노동계급이라는 말을 처음 접했다. 일하던 공장 작업반장이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차를 건네며 말했다. “우리는 노동계급이다.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이다.” 군인도 아닌데 무슨 놈에 계급이냐며 한 귀로 흘렸지만 자꾸 듣다 보니 그럴듯했다. “지식인과 노동자, 두 계급을 결합시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상상만 해도 신이 났다.
자신의 관점을 잡지에 발표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글마다 뒤집어엎고, 패 죽이고, 타도하자는 용어들이 난무했다. 어릴 때부터 고전교육을 받아 그런지 내용은 천하지 않았다.
후일 두 번째 부인 리이춘(李一純·이일순)을 빼앗아가는 차이허썬(蔡和森·채화삼)과 죽이 맞았다. 자오스옌(趙世炎·조세염)과는 3시간 만에 의기투합했다. ‘꼬마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리리싼의 연설은 일품이었다. 자극적이고 호소력이 있었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법이 없고 일단 뱉은 말은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행동이 말보다 빠를 때도 많았다. 한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볼 때까지 멈추는 법이 없었다. 유학생들은 ‘탱크’라고 불렀다.
1921년 가을, 중국 정부는 “근공검학생들을 위해 프랑스에 대학을 세운다”며 모금운동을 벌였다. 개교를 앞두고 “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근공검학생들의 입학을 거부하자 리리싼은 차이허썬 등과 함께 유학생들을 인솔, 대학을 점령해 버렸다. 중국유학생사에 영원히 남을 대형사건이었다.
프랑스 당국에 의해 강제로 송환당한 리리싼은 상하이에 도착한 다음 날 중국 공산당을 노크했다. 당 서기 천두슈(陳獨秀·진독수)는 리리싼을 후난(湖南)으로 파견했다.
후난성 샹취(湘區) 지역 위원장 마오쩌둥은 고향 후배 리리싼을 광부 1만3000명과 철도 노동자 1000여 명이 몰려 있는 안위안(安源)으로 보내며 신신당부했다. “네게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성질 급한 것만 빼면 나무랄 데가 없다. 혁명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조급증을 버리지 못하면 난폭해지고 결국은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알맞다. 시간을 갖고 당원들을 확충해라.”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지만 몇 달 후 자신의 처남댁까지 홀려 낼 줄은 천하의 마오쩌둥도 예측 못 했다.
새해가 다가오자 리리싼은 고향 집을 찾았다. 부친은 명망가였다. 돈도 많고 땅도 많고 부인도 많았다. 같은 또래들에 비해 아는 것도 많았지만 아들이 강제 송환된 것은 알 턱이 없었다. “유학을 무사히 마쳤으니 장하다. 앞으로 뭘 할 거냐.” 리리싼은 말을 안 하면 안 했지 거짓말은 못 하는 성격이었다. “공산당을 할 겁니다.” 노인네는 “죽을 길 제 발로 찾아나선 놈”이라며 노발대발했다. “나라에 군인과 총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너 같은 애송이들이 천년을 한들 될 일이 아니다.” 리리싼도 지지 않았다. “군벌들에 총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진리와 인민이 있습니다. 죽음은 별게 아닙니다. 희생자가 생겨야 더 많은 사람이 일어납니다. 혁명은 성공하고야 맙니다.”
몇 년 만에 만난 부자는 춘절(春節) 기간을 말싸움으로 허비했다. 부친이 단안을 내렸다. “너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는 살만큼 살아야겠다. 부자간에 인연을 끊자.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살다 보면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 모른다. 그땐 서로 모른 체하자.” 아들이 알았다고 하자 노부는 씩씩거리며 리리싼의 생모 방으로 달려갔다. “어디서 저런 걸 낳았느냐”며 한 대 쥐어박았다. 부전자전, 성질들이 비슷했다. (계속)

리리싼의 대중연설은 당대에 당할 자가 없었다. 파도를 치고 나가는 맹수를 연상케 했다고 한다.1926년 우한(武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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