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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의 달인 리리싼, 거사 실패 뒤 가족과 생이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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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호 29면

1931년 봄, 다퉁(大同)유치원의 보모와 혁명가 유자녀들. 첫째 줄 왼쪽 다섯 번째가 차이허썬과 리이춘의 딸 차이좐. 여섯 번째는 농민대왕 펑파이의 아들 펑아싼. 둘째 줄 왼쪽 첫 번째가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 오른쪽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마오의 아들 마오안칭과 마오안룽. 셋째 줄 왼쪽 두 번째는 리리싼의 딸 리리(李力)를 안고 있는 리충산. [김명호 제공]

1990년대 초에 출간된 트로츠키파 원로 정차오린(鄭超麟·정초린)의 회고록에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1923년 리이춘(李一純·이일순)이 한커우(漢口)에서 리리싼(李立三·이립삼)의 아들을 순산했다. 언니를 돌보기 위해 와있던 리충산(李崇善·이숭선)을 리리싼은 가는 곳마다 데리고 다녔다. 꼭 지남철 같았다. 처제를 못 잊어 하던 리리싼이 고의로 차이허썬(蔡和森·채화삼)과 리이춘을 결합시켰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40>

차이허썬과 결혼한 리이춘은 첫 번째 남편 양카이즈(楊開智·양개지)에게 동생 리충더(李崇德·이숭덕)를 소개시켜줬던 것처럼, 두 번째 남편이었던 리리싼에게는 막내 동생 리충산을 데리고 갔다. 1927년 1월, 리리싼은 리충산과 결혼식을 올렸다.

리리싼은 파업과 폭동이 전문이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허룽(賀龍·하룡)등이 난창(南昌)에서 일으킨 중공 최초의 무장폭동을 처음 제의한 사람이 리리싼이었다. 당내에서 지위가 점점 올라갔다. 리충산은 딸 둘을 연달아 낳았다. 애들이 태어날 때마다 “난세일수록 늘어나는 건 사람밖에 없다”며 픽 웃었다.

1950년 가을, 한국전 참전 직전 외가를 찾은 마오안잉(뒷줄 오른쪽 첫 번째). 외삼촌 양카이즈, 외숙모 리충더, 외조모 샹전시와 유일한 사진을 남겼다.

1930년 중앙 정치국은 리리싼이 제창한 ‘도시폭동’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난징(南京), 우한(武漢), 상하이(上海) 등 대도시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모두 실패했다. 중국의 실정과는 동떨어진 무모한 시도였다.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모든 책임은 리리싼의 몫이었다.

코민테른은 리리싼을 모스크바로 소환했다. 리리싼은 만삭의 리충산과 어린 두 딸을 두고 중국을 떠나며 당부했다. “애가 태어나면 남에게 줘라. 나중에 다시 찾으면 된다.” 16년간 소련에 억류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리리싼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중국으로 돌아가는 저우언라이를 통해 리충산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너무 먼 곳에 서로 떨어져있다. 함께 할 기회가 거의 없어 보인다. 각자 살길을 찾도록 하자”는 내용이었다. 리리싼이 떠난 후 리충산이 속해있던 당 조직에 국민당 특무들이 들이닥쳤다. 체포된 리충산은 옥중에서 몸을 풀었다. 또 딸이었다. 당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젊은 부부에게 딸을 건넸다.

감옥에서 풀려난 리충산은 두 딸을 데리고 다퉁(大同)유치원을 찾아갔다. 리리싼이 설립하고 ‘홍색 목사’ 둥젠우(董健吾·동건오)가 운영하는 혁명가 유자녀들의 요람이었다.
생모 양카이후이(楊開慧·양개혜)가 사형 당한 후 외할머니 샹전시(向振熙·향진희)와 외숙모 리충더의 품에 안겨 사지를 빠져나온 마오쩌둥의 세 아들을 비롯해 큰언니 리이춘과 차이허썬 사이에 태어난 차이좐(蔡轉·채전), 마오쩌둥이 농민운동 대왕이라고 극찬했던 광둥 꼼뮨의 지휘자 펑파이(彭湃·팽배)의 어린 아들 등이 모여 있었다. 이름도 바꾸고 보모로 위장한 리충산은 이들을 모른 체했다. 홍콩에서 체포된 큰 형부 차이허썬이 처형당했고 리이춘이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말을 듣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보모 한 명이 행방을 감추자 중공 지하조직은 유치원을 해산시켰다. 총서기 장원톈(張聞天·장문천)의 안전을 우려하던 중앙당은 리충산에게 위장결혼을 권했다. 리충산은 두 딸을 런비스(任弼時·임필시)의 부인에게 맡기고 장원톈의 거처로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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