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만화의 '사무라이 판타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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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리 나라, 일본의 삼국은 같은 한자 문화권이면서도 지금은 꽤나 다른 한자를 쓰고 있습니다. 중국은 새로이 만들어낸 '신한자'를 쓰고 있고,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쓰고 있는 '古한자'를 쓰고, 일본은 쉽게 줄인 '略한자'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삼국의 한문학자들 사이의 뜨거운 감자로 학계에서도 토론이 치열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세나라에서도 변함없이 쓰는 한자 중에 하나에 '士'라는 한자가 있습니다. 현재의 쓰임도 비슷하고 발음도 비슷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틀리죠. 특히 우리나라와 일본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서 士는 '선비'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士는 '사무라이'라는 의미로 쓰여 왔죠.

사무라이라는 계급의 형성시기는 학자마다 다른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혹자는 야마토국(일본의 최초의 통일 왕국으로, 지금 일왕도 야카토국의 후예임)의 성립 때부터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혹자는 일본에서 막부정치가 형성된 시기부터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사무라이 계급은 1500년대 이후 일본을 움직이는 중요 계급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농-공-상'의 최상층에 속하여 다른 계급보다 위에 있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특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심했던 특권이 '키르스테 고멘'(직역하면 '베고나서 미안')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사무라이 계급에 반항하는 하층 계급을 칼로 베어죽여도 처벌 받지 아니한다는 특권이었습니다.

사무라이 계급과 우리나라의 양반 계급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사무라이 계급은 개방적이었는데 비하여, 양반 계급은 폐쇄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아시다시피 양반 계급은 '한번 양반은 죽어도 양반, 한번 상놈은 죽어도 상놈'이라고 하여 자신들의 계급적 특성을 지켜왔습니다.

반면 사무라이 계급은 검을 갖고 명성을 얻으면 사무라이가 될 수 있었던 개방적 성향을 보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풍신수길, 즉 토요토미 히데요시죠. 그는 원래 농민의 자식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재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 지방을 다스리던 무장,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들어 아시가루, 즉 졸병에 뽑혀 오다가 천하를 통일하는 동안 점점 승진해갑니다. 그러다가 오다 노부나가 아래의 제일 높은 가신이 됩니다. 군대로 치면, 이등병이 별을 달게 된 것이죠.
또 더욱 대단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가 쿠데타에 의해 죽자 스스로 쿠데타군을 진압하여 오다가 이룩해놓았던 바탕 위에 천하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등병이 국가 원수가 되어버린 셈이라 하겠습니다. 그 정도로 사무라이 계급은 오픈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무라이의 역사가 길었던 것만큼, 사무라이를 주인공으로 한 수많은 만화가 등장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배가본드〉 〈무한의 주인〉 〈바람의 검심〉의 3편을 역사적 배경과 함께 살펴볼까요.

역사적인 순서는 배가본드-무한의 주인-바람의 검심 순이니까, 그 순서대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군요.

먼저 〈배가본드〉. 주인공도 작가도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죠. 주인공은 미야모토 무사시. 실존 인물이라고 전해지는 일본 최고의 검객입니다. 그는 평생동안 무적으로 지내죠. 말년에 천주교를 믿기 위해 민란을 일으킨(당시 일본에서는 천주교는 금지되어있었죠) 아마쿠사 시로우 토키사다와의 싸움에서 비겼습니다.(사무라이 스피리츠라는 오락에서 이상한 수정 구슬을 들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도류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고 고향 친구이자 평생의 라이벌인 사사키 코지로와의 싸움은 너무나 유명하죠.

또 작가 이노우에 타케히코는 〈슬램덩크〉로 유명세를 탄 만화가이죠. 슬램덩크 이후 〈버저비터〉라는 인터넷 농구만화 등 몇몇 만화를 그리다가 〈배가본드〉로 다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시대는 전국시대 말기입니다. 오다 노부나가 사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실권을 쥐고 있던 시대죠.(6권에 오사카성 건축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일본 전국에 수많은 유파가 존재했었던 시대이죠. 어떤 사람들은 유명한 검파의 문하생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은 후, 그 검파의 이름을 짊어지고 유명해지고, 또 어떤 사람은 낭인으로 살면서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유명한 검객을 물리치거나 혹은 유명 도장을 찾아가서 도장 파괴(도장의 대표를 물리쳐서 그 검파를 없애버리는 것, 간판을 부수기도 한다.)를 하거나 해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도 했었죠.

주인공 미야모토 무사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강해지기 위해서 인슌을 찾아가서 싸움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이기면 실력있는 무사로서 인정을 받게 되는 겁니다.

다음은 〈무한의 주인〉. 이 시대는 배가본드의 시대보다 약간 시간이 흐른 뒤입니다. 몸속에 이상한 벌래가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이 되어버린 만지라는 검객의 동생이 악당에게 살해당합니다. 그 후 그는 악당 1000명을 베기로 하는데 그런 만지에게 린이라는 여자가 도움을 청하로 옵니다. 린은 부모의 원수인 일도류 일당을 물리치고 싶어하죠. 만지는 린의 부탁을 받아들여 일도류와의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 만화의 배경은 에도 막부 시대입니다. 만화속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죠. 지방과 지방 사이에서 관문의 역할을 했던 '세키'라는 제도나, 가끔 대사에서 나오는 '관리', '장군'이라는 명칭은 전국 시대이후 토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감)이 일본을 통일한 후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이 시대는 사무라이 계급이 조금씩 폐쇄적으로 변하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대부분의 무사는 어느 성주의 신하로서 들어가 버린 것이죠. 우리나라에서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문관이 무관의 역할을 했던 것처럼, 사무라이들은 문관의 역할까지 맡게된 것입니다. 검의 시대는 차츰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었죠.

그런 시대가 200년쯤 흐르고 에도 막부는 유신파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됩니다. 개화를 바라는 유신파와 옛제도를 고집하는 막부는 치열한 전투를 계속했는데 유신 무사와 신선조와 싸움은 자주 만화나 사극에 이용되는 소재입니다. 막부편을 든 신선조는 멸사 봉공의 깃발 아래서 유신파와 끝까지 싸웁니다.

하지만 선진 기술을 이용하여 싸운 유신파가 이겨서 막부시대는 끝나게 됩니다.
그 유신파가 일본의 실권을 쥐게된 시대가 〈바람의 검심〉의 시대입니다. 와츠키 타케히코라는 무명작가를 일약 소년챔프가 밀어주는 대표적 작가가 되게 한 작품이죠. 재미와 역사성을 멋지게 조화시킨 이 만화이기도 합니다.

유신파는 메이지 유신 이후 폐도령을 내리고 계급차를 없앴습니다. 사실상 이때부터 법적으로는 사무라이 계급은 소멸합니다. 살인검은 사라지고 활인검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무사는 검도 도장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검 하나로 살아가던 자들은 역사 뒷편으로 사라져 가게됩니다. 마치 히무라 켄신이나, 사이토 하지메 처럼...

일본이라는 나라의 국민들에게 사무라이는 정신적 지주 같은 존재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무사도 정신' '사무라이 정신'이 전처럼 기형적으로 분출될 때가 다시 오면 인류는 3번째 대전을 겪어야 할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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