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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어(gore), 과잉의 미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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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의 공원에서 분리되어 쓰레기봉투에 버려진 사체가 발견되었다. 피해자는 퇴역 군인이라고 했다. 잔혹한 살해 수법을 미루어 보면 단순 강도는 아닐 것이고 원한에 의한 살인으로 추측하고 수사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살인자가 밝혀졌다. 바로 피해자의 둘째아들. 대학 2학년을 휴학하고 군대에 다녀온 아들은 아버지가 돈을 벌어 복학하라고 하는 말에 부모는 늘 자신을 무시했고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먼저 어머니를 망치로 죽이고 나서 아버지를 죽였다. 그리고 목욕탕에서 잔혹하게 사체를 토막냈다. 그리고 그 사체를 검은 쓰레기봉투에 넣어 과천공원을 비롯해 곳곳에 나누어 버렸다는 것이다.

2000년, '엽기'라는 단어가 한바탕 유행하고 있지만 정말 엽기적인 뉴스를 접하는 마음은 참혹하다. 경찰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 살인행각에 가해자의 정신 상태를 감정하겠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나 신문 기사들에 따르면 가해자는 정신병력도 없고, 특별히 만취한 상태도 아니었다고 한다. 한 의사는 어렸을 적부터 부모에게 자신만 소외되고 무시당한다고 생각한 피해의식이 살해 당일에 폭발한 것이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참으로 참담한 일이다. 이런 뉴스는 정말 달갑지 않다. 기분이 나빠진다.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피와 죽음에 대한 매혹과 역겨움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에서 마주하는 피와 죽음은 나를 섬뜩하게 한다. 매혹은 사라지고 역겨움만 강하게 남는다. 그것은 고어와 하드코어(포르노)의 차이점과도 동일하다.

하드코어 포르노의 경우 그 장르가 보여주는 과잉과 비정상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인위적인 조작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장치인 남자 배우의 체외 사정을 통해 진실을 주장한다. 결국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판타지(포르노의 진행 중 어디 현실적인 것이 있던가? 과장된 크기와 과장된 액션 그리고 과장된 희열)는 체외사정이라는 결과물을 통해 조작이 아니라고 항변하며 허구에서 빗겨나간다. 그래서 포르노를 보는 사람들은 허구라는 틀 안에 안착하지 못한다.

반면 하드고어의 경우 절단된 육체와 쏟아지는 피 그리고 터지는 내장을 통해 고통의 순간을 클로즈업해 보여주어도 늘 '허구'라는 틀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과잉과 노골성을 통해 피와 죽음에 대한 매혹을 만족시켜준다.

우리가 고어를 보면서 금지된 판타지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은 '조작된 허구'라는 믿음이다. 만약 보여지는 실상이 조작된 허구가 아니라면(이를테면 스너프 필름처럼 진실을 항변하며 그것이 100% 진실이라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고어가 지닌 과잉의 미학 대신 죽음을 마주한 참혹함에 시달려야할 것이다. 적어도 실재의 죽음이란 늘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어는 조작된 허구를 가장 첫머리에 내건다. 그리고 그 조작된 허구가 지닌 과잉을 통해 금기를 실현한다.

미우라 켄타로우의 〈베르세르크〉는 보기 힘든 고어 만화다.
배경은 악마와 인간이 공존하는 중세시대. 자신의 아이가 죽어 상심한 용병 감비노의 아내 시즈는 어머니의 시체 아래에서 이제 막 태어나 피와 양수가 뒤섞인 더러운 물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구해준다.

아이 가츠가 조금 자랐을 때 어머니 시즈는 페스트로 죽고 감비노와 함께 전쟁에 나선다. 가츠는 자기 키보다 큰 칼을 휘둘르며 용병으로 자라나는데,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밤 동료 용병에게 강간당한다. 분노에 쌓인 가츠는 출전한 전쟁에서 그 용병을 죽이지만 감비노는 부상당한다. 그리고 가츠는 우연히 감비노를 죽이게 되고 용병단에서 도망나와 떠돌이가 된다. 그러던 중 그리피스가 이끄는 매의 단에 가입하게 된다.

그리피스는 나를 자기 손에 쥐겠다는 대단한 야심가. 가츠는 그리피스의 매력에 이끌린다. 매의 단은 100년동안 전란에 휘말린 미들랜드의 용병으로 들어가 승승장구 정규군이 되고 그리피스는 귀족의 칭호까지 받는다. 결국 매의 단은 전란의 상대방인 튜터군의 성을 함락하고 메릴랜드에 개선하게 된다. 바로 그때 가츠는 그리피스의 곁을 떠나고 그리피스는 상심한 채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마음을 산 공주의 방에 들어가 공주와 동침하게 된다.

결국 그 일이 발각되어 지하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게 되고 매의 단은 간신히 위기를 넘긴채 미들랜드를 탈출한다. 시간이 지난 후 우연히 가츠는 매의 단과 만나 그간의 사정을 듣고 미들랜드 지하 감옥에 갇힌 그리피스를 구해낸다. 그러나 그리피스는 온갖 근육이 잘려지고 피부가 벗겨진 만신창이가 된 상태다.

비록 전장에서 벌어진 살육이 그대로 보여지지만 그것은 참혹한 중세의 전투로 받아들일 수 있다. 피와 살점이 튀는 장면도 고어 특유의 반복되는 살육과 그것의 직선적인 묘사보다는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마의 낙인이 찍힌 채 고드핸드(그리피스)를 향한 분노를 내뱉는 현재의 가츠 이야기보다 과거의 가츠는 훨씬 더 온화하다.

〈베르세르크〉가 고어로 읽히는 이유는 믿어지지 않는 마물들과의 조우에서부터 시작된다. 매의 단이 미들랜드 군으로 활약할 당시 성을 함락시키고 적의 대장을 제압 못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자 가츠가 직접 성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만난 것은 인간이라고 믿을 수 없는 존재인 조드. 머리가 잘리고 내장이 터진 시체들이 가득한 곳에 서 있는 조드는 한 손으로 사람 머리에 손가락을 넣어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칼에 두 사람을 꿰어들고 있다.

〈베르세르크〉는 '인간이 도달하지 못하는 세계, 인간을 뛰어넘은 존재와의 대결'을 고어적 표현으로 독자들에게 실감나게 전달한다. 고어가 보여주는 과잉의 노골성은 가츠라는 인물이 들고 있는 자신의 키보다 큰 검과 그 검을 이용해 잘라내는 인간의 육체, 그리고 잘라도 잘라도 죽지 않는 마물들과의 대결을 통해 현실에서 발견할 수 없는 허구의 세계로 진입한다.

〈베르세르크〉는 중세에 있을 법한 전란과 암투, 허구의 판타지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인간은 기억 저편 마음에 입은 작은 상처를 가리기 위해 검을 쥔다'는 강한 이야기 구조는 반복되는 살육의 고어를 풍요롭게 만든다. 그것이 〈베르세르크〉의 매력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만약 〈베르세르크〉에서 벌어진 살육의 현장에 내가 있다면 나는 아마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화인 〈베르세르크〉는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읽힌다. 우리는 이 작품을 보면서, '허구'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베르세르크〉는 그래서 과잉의 미학으로 인간의 피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매혹을 만족시키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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