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생을 선택하지 않을 것을 선택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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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스무 살이 너무 많은 나이라고 생각하던 열 일곱 살 소년이 어떻게 스물 여섯 살이 되었는지.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문학과 영화 중 어느 쪽이 더 좋냐고. 어리석은 질문이다. 맑고 화창한 일요일 오후, 푸른 하늘과 투명한 햇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아름답냐는 질문처럼. 그러나 내가 내 자신에게 그 비슷한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소설이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볼 때 그렇다. 소설이 나은가, 영화가 나은가?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책보다는 영화로 많이 알려진 〈트레인스포팅〉은 영어권에서는 수천만부가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이다. 나는 사운드트랙 CD를 제일 먼저 샀고 그 다음 영화를 봤고, 나의 첫 장편소설이 영화화 되고 난 후에〈트레인스포팅〉의 원작을 읽게 되었다.

내 소설과 묘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갖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공통점이라면 작품의 테마가 '젊음'이라는 것이다. 차이점은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포기하고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트레인스포팅이 내 소설보다 몇 배는 더 '진짜'라는 것이다.

〈트레인스포팅〉속에는 스무 살을 전후한 젊은이들이 살아 있다. 그들의 팔뚝에 아로새겨진 주사바늘 자국들만큼이나 분명하게, 전날 밤에 취한 채 패싸움을 벌이다가 찢어진 이마의 상처만큼이나 분명하게, 비참하게 헤어진 연인의 뒷모습만큼이나 분명하게 살아있다.

흔히들 이 작품을 정키소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트레인스포팅〉에는 마약 이야기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그 어떤 것도 메울 수 없는, 빌어먹을 가슴팍 한가운데에 쑤셔넣은 주먹 같은 커다란 블랙홀'을 잠시나마 메우는데 쓰이는 하나의 매개체일 뿐이다.

본문에서 인용한 과격한 표현처럼, 이 작품 전체를 통해 내가 느낀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메워질 수 없는 갈증이었다. 그것은 곧 젊음의 속성이리라. 우리는 그 갈증을 달래기 위해 방황하고 고민한다.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일 지 모르지만, 결국 트레인스포팅 속에 살아 있는 스코틀랜드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일 뿐이다.

그들은 이야기한다. '자신이 싸갈겨 놓은 이기적이고 막돼먹은 애새끼들에게 창피한 존재가 되어 자신을 저주하면서 헛되이 썩어가는 인생을 선택할 바에는 인생을 선택하지 않을 것을 선택하겠다'라고.

이 책에는 막막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젊음의 몸부림이 부글거리며 끓고 있다. 일탈과 소멸, 그리고 재생의 에너지가 터질 듯이 모여 있다. 이 책은 징그러울 정도로 또렷하게 살아 있다.

〈트레인스포팅〉에는 수많은 인물들과 수많은 사건들, 그리고 그만큼이나 많은 이슈들이 등장한다. 정치상황, 사회문제들, 민족정체성에 관한 갈등, 대중문화, 성담론 등등... 이 책은 작가인 어빈 웰시가 살았던 80년대의 스코틀랜드를 압축시켜 옮겨 놓은 것 같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결코 먼 나라의 황당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고 바로 지금 내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삶의 모습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 표면적인 모습만 다를 뿐이지, 결국 사람 사는 세상에서의 문제들은 국가나 민족의 테두리에 상관없이 그 본질에 있어서는 맞닿아 있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훌륭한 소설들은 그런 깊은 본질들을 생생하게 끄집어 내어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지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무거운 내용만을 담고 있는 건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의 절반 이상은 웃음을 참을 수 없는 황당한 에피소드들로 엮어져 있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이 웃어본 적은 예전에 윤흥길 씨의 소설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물론 웃음을 자아내는 이유는 완전히 틀리지만.

중요한 것은 그 웃기는 에피소드들 속에 허황되지 않은 진실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한참 웃다가 보면 가슴 속으로 무거운 감정 덩어리가 침전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젊음의 본질이 그렇지 않은가? 눈물과 웃음소리, 사랑과 증오, 철학적 고민들과 깃털처럼 가벼운 패션이 한데 뒤섞여 있는 그 무엇.

우리는 '성장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소설들을 참으로 많이 알고 있다. 그 언뜻 떠오르는 대표적인 작품들조차 열 손가락 안에 다 꼽을 수 없을만큼 많은. 하긴 넓은 의미에서 모든 소설은 성장소설이라고 한 이도 있으니까.

〈트레인스포팅〉도 굳이 성격을 따져 본다면 성장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다른 성장소설들과 비교해 이 책만이 가지는 독한 냄새가 있다. 이 책은 결코 교훈적이지 않다. 이 책은 다만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젊음에 있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다른 이들의 교훈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직접 겪어내야하는,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환희로 가득한 자신만의 경험이다. 너가 원하는 것을 선택해라. 그것이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겠다는 오기라도 좋다. 너는 다만, 살아 있을 뿐이다.

오래 전, 열 일곱 살 때 나는 사회에서 성년임을 인정받는 '스무 살'이 너무 많은 나이라고 생각했다. 3년이라는 세월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스무 살까지 버티지 못하고 세상 밖으로 떨어져 나가거나 내 자신 속으로 함몰해 버릴 거라고 확신했다.

그 시절로부터 십년이 흐른 지금, 스물 여섯 살의 나는 세상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건강하게 살고 있다. 가끔 나도 모르게 '이제 겨우 스물 여섯'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은 걸 보면 아직 내 젊음의 열병은 식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혹시 이미 어른이 되어 버린 사실을 스스로 부정하고 싶은 것일까?

〈트레인스포팅〉을 읽으면서 나는 몇 번이고 지난 십년 동안의 시간을 되돌아 보았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본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생의 한가운데? 이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재익(소설가)

▶프로필

이재익

75년: 경북 울진 출생 (87년 서울로 이주)
91년: 구정고등학교 입학, 록그룹〈ZEST〉의 멤버(기타, 보컬)로 클럽 활동
94년: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입학
95년: 과내 영어연극단〈LUCID DREAM〉에서 배우로 활동
록그룹 〈LSD〉결성, 클럽 활동
96년: LUCID DREAM에서〈OTHELLO〉연출.
97년: 카투사 복무 중 '문학사상' 지에 소설 부문으로 등단
98년: 문학사상사 장편소설상 수상작 〈질주질주질주〉출간
소설을 영화화한 〈질주〉의 시나리오를 이상인 감독과 각색 작업
99년: 단편〈레몬〉발표
(주) '한울시네'에서 제작한〈질주〉(주연 이민우, 김승현) 8월 개봉
기획사 '링크'에서 시나리오 〈태마〉(가제) 집필
00년: 도서출판 '자작나무'에서 두 번째 장편소설 〈200X 살인사건〉출간
단편 〈중독자의 키스〉발표
영화사 ㈜ 신씨네에서 공모한 시나리오/기획 공모에서
〈200X 살인사건〉의 영화화 기획이 당선되어 영화 제작 중.

현재: 록 그룹 메니지먼트 사이트 WWW.NEVERMIND.CO.KR 운영자
웹진 WWW.THESEA.CO.KR에 음악 평론 연재 중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4학년 재학 중, 2001년 2월 졸업예정

연락처: 서울 강남구 청담동 삼익 아파트 2동 502호
집: 543-4644, 핸드폰: 011-245-4644, e-mail: thejack@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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