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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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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자유민주주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표기를 둘러싼 논란이 치열하다. 논란은 이제 대한민국의 건국정신·헌법·정체성·미래교육·북한인식·통일문제에 이르기까지 확산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모든 가치 논쟁과 체제 논쟁이 그렇듯 금번 역시 사실에 대한 확인과 객관적 논증보다는 이념적 낙인과 일방적 소리 지르기로 흐르고 있다. 이마누엘 칸트는 일찍이 사실 이전과 이후의 이성을 사이비이성과 참이성으로 나눈 바 있다. 즉 사실은 참이성의 근거가 된다. 지금의 논란은 과연 사실에 바탕한 이성적 주장의 산물인가?

 우리가 공동체의 핵심 정신과 가치를 교육하려 할 때 교과서는 가장 중요하다. 이 때문에 파당적·정권적 주장보다는 공동체의 가장 보편적인 정신과 가치를 담아야 한다. 교육은 한 인간의 영혼과 한 공동체의 정신을 가장 크게 좌우하며, 잘못된 교육은 공동체를 분열과 파멸로 이끌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과서의 모든 표현은 우리가 후대에 전수할 경험·성찰·지혜의 정수(精髓)요, 진액이어야 한다. 탈냉전 직후 고교 교과서 집필에 참여할 때 이 점은 늘 필자를 숙연하게 하곤 했다.

 그럴 때 자유민주주의를 교과서에 넣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체제나 제도를 넘는 가치와 정신으로는 더욱 그러하다. 근대 이후 우리 공동체의 최고 정신과 가치는 ‘민주공화’였다. 근대국가 수립운동·독립운동·건국운동·헌법개혁에서, 모든 주요 독립헌장·건국강령·헌법초안·개헌안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불변의 제1조였다. 수정 불능의 최고 절대 가치인 것이다. 문제는, ‘민주공화’는 ‘자유민주’를 포괄하나 그 역은 항상 그렇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실 ‘민주공화’조차 자유·평등·민주주의·복지·평화와 같은 인류 공통의 보편가치를 지속적으로 추구·발전·확대해온 대한민국의 성취에 비춰 이들 가치를 교과서에 넣고 가르치는 것에 우선하지 않는다. 아직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이 이들 보편가치의 회복과 실현에서 세계의 한 모범인 점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를 넣을 경우 역사적·헌법적으로도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지 않거나 반대한 세력들을 대한민국 정신과 역사에 포함시키는 문제 때문이다. 이승만, 송진우·한국민주당, 김구·한국독립당 등 핵심 우파는 해방 직후 건국 구상에서 모두 자유시장경제를 지양한 체제를 추구했다. 이들의 체제 구상과 자유민주주의는 일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건국의 중심 정신과 세력에서 배제할 것인가?

 둘째, 건국헌법의 문제다. 건국헌법은 혼합경제와 혼합정체로서 사회민주주의 헌법에 가까웠다. 건국의 교부들은 이를 핵심 건국정신으로 봤다. 미국은 아예 건국헌법을 ‘사회주의 헌법’으로 보았다. 자유민주주의 관점에서 건국헌법과 정신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셋째,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요, 억압자였다. 이승만은 공산체제와 경쟁하고자 시장경제와 의회민주주의를 거부했다.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를 반대하고자 한국적 민주주의를 창안하기까지 했다. 자유민주주의를 반대·억압하였다고 해서 이들을 대한민국 역사에서 삭제하거나 대한민국 정신에 반대한 사람들로 가르칠 것인가? 헌법, 법률, 지도자의 연설, 정부 정책에는 없었지만 자유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이자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기본 노선이었다는 주장을 우리는 종종 듣는다. 헌법 해설은 물론 최고지도자가 반복해 이를 부정·비판했는데도 사후에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유신독재를 정당화하려 정당한 헌법적 민주적 절차 없이 삽입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체제의 핵심 가치로 가르치는 것은 더욱 어불성설이다. 또 본래 민주주의에 대한 좌우 위협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고안물인 특정 외국 ‘서독’의 헌법조항을, 독재정부를 넘어 전체 대한민국의 가치로 삼아서는 더욱 안 된다.

 이미 남북체제 경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를 고려할 때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를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북한을 포함해 모든 인민민주주의는 철저히 실패했다. 한국 같은 선진국가에서 ‘민주주의’로 표기·교육한다고 하여 그것이 몰락한 인민민주주의를 포함하고 있다고 믿을 사람은 없다. 우리는 이미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민주주의’ 표기와 교육 시기에도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를 압도해 왔다.

 해답은 언제 어디서든 어느 체제가 더 인류의 보편적인 정신과 가치를 추구하고, 또 교육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성취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