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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view &] 나파밸리 와이너리서 본 ‘Occupy 시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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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이철형
와인나라 대표

미국 월가(街)와 전 세계 금융가에선 최근 시위가 한창이다. 문제의 원인은 소수의 개인에게 사회 전체의 부가 상당히 몰려 있는 현실에 대한 분노다.

 이상적 사회라면 각 개인이나 기업의 활동은 그들이 사회 전체에 기여한 부가가치만큼 평가되고, 거기에 맞는 대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일반인이 금융자본에 분노하는 것도 금융자본이 산업자본 발달에 필요한 윤활유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않으면서 일한 이상의 대가를 챙기고 있다는 현실에 기인한다. 최근 국내에서 불거지고 있는 자영업자들의 카드 수수료 인하 요구도 이런 시각에서 출발한다.

 사실 대부분의 카드사가 국민의 혈세로 생존이 가능했던 금융기관들의 자회사다. 이들 카드사는 법적으로 카드를 사용하는 것을 거부할 경우 벌금 또는 형벌을 받도록 만들어놓은 제도 아래에서 편안하게 성장을 일궈 오고 있다. 사태가 이렇게 된 데는 정부 탓도 있다. 정부는 지난해 카드업계가 영세업자들의 수수료만 극히 일부 낮춰 주는, 실효성 없는 대책을 승인하는 미봉책을 내놨다. 사태가 장기화되면 자영업자들이 카드 결제를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러 애꿎은 소비자만 피해를 보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금융만이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엔 부동산 문제도 있다. 최근 저축은행 부실의 주원인은 건설회사에 투자한 소위 프로젝트 파이낸싱이다. 자금은 흘러넘치고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금융회사들이 ‘부동산 불패 신화’만 믿고 돈을 쏟아부은 결과가 지금의 혼란이다. 여기에 정부의 어설픈 정책 역시 한몫했다. 역대 모든 정권이 경기가 어려워지면 전가의 보도처럼 내놓은 대안이 건설경기 활성화였고 현 정권 역시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 편하게 수익을 올리려는 금융기관들이 뛰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필자는 최근 미국 출장길에 산 정상의 불모지에 와이너리를 만들어 세계적 명품을 만들어 내는 현장을 방문했다. 미국 나파밸리의 유명 와이너리들은 대개 해발 100m 안팎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 뿌리를 둔 안티카라 와이너리는 해발 600m 산 정상에 포도밭을 일궜다. 와이너리의 오너 일가는 1960년대 중반 캘리포니아를 방문해 와이너리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하고, 85년 이 땅을 매입했다. 와인 생산은 2003년 이루어졌으나 본격적인 와인 출시는 2006년부터였다. 불모지를 부가가치를 낳는 곳으로 바꾼 것이다.

 또 하나는 오소메(Au Sommet)라는 와이너리로 이곳 오너는 프랑스 요리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내에서만 11개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소위 ‘오너 셰프’다. 그 역시 불모지인 해발 700m의 산 정상 부근에 세계적 컬트와인인 스크리밍 이글(Screaming Eagle)을 양조한 하이디 배럿(여)과 합작으로 와이너리를 만들었다. 와인 병에 붙이는 라벨은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사용한다. 연간 약 300상자(3600병) 정도만 생산하는 소량생산 체제를 무기로 ‘미래의 스크리밍 이글’이라고 불릴 정도의 명품 컬트와인을 생산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만약 이런 식의 투자를 우리나라에서 하려 한다면 과연 금융기관들의 투자를 끌어낼 수 있을까? 당장 돈이 되는 부동산이 아니라 생산요소로서 토지를 바라보는 인식은 얼마나 될까.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이 수십억, 수백억원 간다 해도 당장 그 집에서 살아야 하는 이상 동원할 수 있는 가처분 소득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주택시장 거품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야 한다. 집이 소중하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회적 부를 창출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택 투자에 열을 올려 왔다. 그 결과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 주택 가치가 떨어지면 곧장 금융기관 부실로 이어지는 구조다. 위의 사례들처럼 부동산은 사회적 부의 증진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때 그 의미가 더 커진다. 그런데도 정부와 금융기관들은 주택을 투자나 투기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았고,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지도 못하면서 턱없이 비싼 집값에 젊은 세대는 다시 좌절하는 악순환 고리가 생겨난 형국이다.

 그나마 그 악순환 고리마저 끊어질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하늘 모르고 치솟은 임대료의 결과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간다던 서울 청담동 일대 상권의 침체로 이어지고 있다. 불 꺼진 상권은 이 지역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열심히 노동으로 일궈낸 부가가치에 대한 적정한 평가와 대가가 약속되지 않는다면 우리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과도한 복지정책 탓에 성장동력을 잃어버린 유럽이나, 자신의 부만 챙긴 미국의 금융기관들이 남의 얘기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다.

이철형 와인나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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