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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지펀드 환상을 좇는가 … 추락하는 폴슨을 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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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미국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자리 잡은 폴슨앤컴퍼니(Paulson & Co) 사무실. 이 회사 사장이자 금융위기가 낳은 최고의 스타 존 폴슨에게 한 무리의 투자자가 찾아왔다. 그의 헤지펀드가 올 들어 수십억 달러를 까먹자 대책을 따져 묻는 항의 방문이었다.

폴슨은 모든 게 자신의 실수임을 인정했다. 그러곤 꼭 손실을 만회하겠노라고 약속했다. 3~4년 전 단숨에 수백억 달러씩을 벌었던 그에겐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헤지펀드 영웅의 부상과 몰락

 1994년 회사를 세워 헤지펀드를 운용해 온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건 2006년. 미국 주택시장의 위기를 감지한 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증권이 폭락한다는 데 거액을 베팅했다. 이를 통해 2008년까지 무려 200억 달러(약 23조원)를 벌어들였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는 이듬해 또 대박을 터뜨렸다. 위기가 깊어지면 달러화 가치가 떨어지고 다른 안전자산에 돈이 몰릴 거라고 판단, 금에 대거 투자를 했던 것이다.

 금값이 최고치를 경신하며 치솟은 덕에 그는 지난해 자기 연봉으로만 50억 달러(약 5조7000억원)를 챙겼다. 월가 역사상 최고 액수였다. 올 초 모교인 뉴욕대(NYU) 스턴스쿨을 방문했을 때 그의 인기는 할리우드 스타급이었다. 이랬던 그가 불과 반 년 만에 체면을 완전히 구긴 건 경기 흐름을 잘못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미국 경제가 회복될 때”라고 공언하며 미국 기업 주식을 대거 사들였다. 그런데 ▶그리스 국가 부도사태 ▶미국 신용등급 하락 등 악재가 줄 이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휼렛패커드(hp) 등 배팅했던 기업 주가가 폭락했고, 펀드 수익률도 고꾸라졌다. 그의 대표 펀드인 어드밴티지플러스의 올해 수익률(9월 말 기준)은 -47%. -10% 안팎인 다른 헤지펀드의 수익률과 비교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절대 수익’ 추구 … 보장은 없어

 헤지펀드의 속성을 감안할 때 폴슨의 부침(浮沈)이 놀랄 일은 아니다. 헤지펀드는 1949년 포천(Fortune)지 기자였던 앨프리드 윈슬로 존스가 여기저기서 돈을 모아 만든 게 최초다. 존스는 자신의 펀드에 이전엔 없던 새 기법을 도입했다. 값이 오를 것 같은 종목은 사들이는 한편 떨어질 것 같은 주식은 공매도하는 식인데, 지금은 너무 잘 알려진 ‘롱-쇼트(Long-short)’ 전략의 시초였던 셈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시장의 위험을 막을 울타리(hedge)를 쳤다”고 하여 헤지펀드란 말이 나왔다.

 

 헤지펀드의 특징 중 하나는 정해진 목표치, 즉 ‘절대 수익률’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주식이나 외환 등 투자 대상 시장이 출렁거려도 일정한 플러스 수익을 내는 방향으로 펀드를 설계한다. 요즘 같으면 대개 연 7~8% 정도가 대세다. 이런 수익을 내기 위해 헤지펀드는 주식·채권 투자 외에 ▶원자재 선물 투자 ▶공매도 ▶기업의 적대적 인수합병(M&A)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한다. 일부는 조세 회피지역에 펀드를 설립, 제도권의 감시를 피해 투자 수익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전략도 시장의 큰 흐름 자체를 잘못 짚으면 무용지물이다. 시장이 좋아질 것으로 예측해 펀드를 설계했는데, 갑자기 ‘블랙 스완’이 등장해 거꾸로 뒤집히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폴슨이 그랬다. 미국 경제가 좋아지는 쪽에 배팅했는데, 그리스 사태 등 악재가 기승을 부리면서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그래도 미국 경제는 회복”

 벌써 시장에선 폴슨의 헤지펀드가 가지고 있는 주식 중 무엇이 매물로 나올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의 헤지펀드에 돈을 넣은 투자자들이 올해 말 대규모 환매를 할 경우 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산 중 일부를 내다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언론에선 “독수리 떼들이 폴슨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고까지 표현했다. 그래도 폴슨은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인터뷰에서 그는 “내년엔 미국 경제와 증시가 회복한다”며 “조만간 우리 회사가 엄청난 수익을 내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비록 단기 타이밍에 문제가 있었지만 큰 흐름은 틀리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투자자들도 현재까진 크게 동요하지 않는 분위기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2005년 그의 헤지펀드에 돈을 넣은 투자자들의 수익률은 여전히 270%나 된다. 2008년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5%의 차익을 본 상태다. 워낙 전적이 화려했던 만큼 한 번 더 믿고 기다려 보겠다는 이가 많다는 얘기다.

한국형 헤지펀드에 주는 교훈

 이르면 다음 달 한국에도 헤지펀드가 등장하게 된다. 자본시장법 시행령의 개정으로 헤지펀드 설립에 대한 장벽이 사라졌다. 금융위원회는 이달 중으로 헤지펀드 운용신고서를 받아 심사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미 몇몇 자산운용사는 헤지펀드 설립 준비를 마친 상태다. 일각에선 요즘같이 시장 변동성이 클 때 ‘절대 수익’을 추구하는 헤지펀드가 답이 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나온다

 그러나 폴슨의 사례에서도 드러났듯 헤지펀드는 결코 천하무적이 아니다. 한순간의 판단 미스로 좌초하기 일쑤다. 이승재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세계적으로 연간 새로 생기는 헤지펀드가 1000개가 넘지만 수익이 나빠 사라지는 것도 500개에 달한다”며 말했다. 헤지펀드를 무슨 ‘전가의 보도’로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며, 펀드의 운용전략과 트랙 레코도(과거 실적)을 따지고 또 따지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필규 jTBC 기자

◆존 폴슨=1955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뉴욕대에서 금융을 공부한 뒤 하버드대 경영대학에서 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보스턴컨설팅에서 컨설턴트로 출발해 94년 헤지펀그룹 폴슨&컴퍼니를 설립했다. 조지 소로스 이후 가장 뛰어난 헤지펀드 플레이어로 꼽힌다. 2007년 미국 주택시장 붕괴를 예측해 200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포브스지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지난해 말 현재 155억 달러(약 17조7000억원)로 세계 39위 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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