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리' 최민식 형사역으로 연극판 복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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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는 메시지다." 캐나다 커뮤니케이션 학자인 마셜 맥루헌(1911~1980)이 현대사회의 정곡을 찌르며 남긴 말이다. 정작 전달하려는 내용은 사라지고 그 수단인 미디어만 남는다는 뜻. 그는 미디어의 내용은 도둑이 감시견을 따돌기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고깃가루와 같다고 비유했다. 여기서 미디어는 주로 TV를 가리킨다.

1998년 개봉한 피터 위어 감독의 영화〈트루먼쇼〉는 어떤가. 보험회사 샐러리맨의 일거수 일투족을 TV 생중계로 구경하며 키득거리는 사람이 기억날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끔찍한 일임에 분명하다. 만약 당신이 그 샐러리맨이라면….

장진(29)의 신작 '박수칠 때 떠나라' (16~30일 LG아트센터.02-2005-0114)의 밑바닥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깔려있다.TV가 토해내는 무수한 발언과 그 속에 가려진 진실의 관계를 따진다.

얘기가 무거워졌다. 하지만 연극 자체는 무척 경쾌하다.영화 〈간첩 리철진〉〈기막힌 사내들〉, 연극 〈택시 드리벌〉〈아름다운 사인〉 등 전방위로 활동해 온 젊은 작가 겸 연출가 장진의 재기발랄함이 배어있다.

연극은 추리소설처럼 전개된다. 강남의 최고급 호텔에서 미모의 광고회사 여사장(추귀정)이 변사체로 발견된다. 전신에 아홉 군데나 흉기에 찔려 숨진 것. 호텔방에 휘발유통을 갖고 들어갔던 용의자가 즉각 검거된다.그러나 부검 결과 여사장은 피살 직전 독극물을 마신 것으로 판명된다. 잇따르는 수사혼선.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줄거리는 섬뜩한 탐정소설을 닮았지만 작품은 철저히 연극적이다. 영상문화에 길들인 젊은 관객들을 겨냥한 듯 장면전환이 신속하고 대화 곳곳에 복선을 깔아 놓아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게 한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강력계 형사로 영화 〈쉬리〉〈해피엔드〉의 최민식이 1년여만에 연극판에 서는 것도 화제다.

작품의 묘미는 이 살인사건을 TV로 생중계한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에서 비롯한다. 미모의 여사장 피살이란 자극적 소재로 시청률을 높이려는 방송사 측이 '특집 생방송, 누가 그녀를 죽였는가!' 를 긴급편성하고 수사과정 전말을 찍어댄다. 스포츠 중계처럼 진행자와 해설자가 달라붙어 시청자의 눈길을 최대한 잡아두려고 갖은 아이디어를 동원한다.

시청자 거리 인터뷰, 범인 알아맞추기 전화퀴즈, 피살자 소지품 TV경매, 살해과정 재연 드라마 등등.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연습장의 배우들조차 상대를 보며 킥킥댈 정도다. 결국 중계방송은 대성공한다.시청률 50%에 점유율 89%란 경이적 수치를 기록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사람들 관심이 피살원인.살해범 등 사안의 본질에서 벗어나 이를 둘러싼 소소한 화제거리로 쏠린다는 점. 진실과 허상을 전도하는 TV의 선정성을 비꼬는 통렬한 블랙 코미디다. TV중계를 보도국이 아닌 예능국이 맡는다는 설정에서도 작가의 풍자정신이 살아있다.

공연 중간 수사반장(윤주상)과 최형사(최민식)가 이런 대화를 나눈다.
▶형사〓반장님… 우리 하는 게 쇼입니까? 코미디입니까?
▶반장〓다분히 쇼고 어느 정도는 코미디 아냐?
▶형사〓그렇죠? 그러게요… 다분히… 누구는 칼에 찔려 죽고…, 누구는 그걸로 돈을 벌고 누구들은 그걸 보며 좋아들 하고….

작가는 관객들도 결국 이런 코미디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짧고 가벼운 대사를 즐겨 쓰는 젊은 작가 장진도 그 뿌리에선 인간의 본질이란 고전적 주제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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