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D-100] ②태릉선수촌 24시

중앙일보

입력

"좀 힘있게 들어가란 말이야" 6월의 따갑고도 다소 끈적끈적한 해가 중천을 넘어선 태릉선수촌의 7일 오후 3시.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눈동자가 보일 듯 말 듯 검은 선글라스를 쓴 임도재 육상코치(단거리)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흐른다. 남자 400m허들의 이두연(서천군청)의 기록이 부쩍 올랐기 때문이다.

시드니올림픽이 100일 앞으로 다가왔다.

지금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올림픽 기준기록(50초20)은 물론 황홍철의 10년 묵은한국기록(49초80)을 깨는 것도 시간문제인 듯 싶다.

육상 스프린트는 0.1초 단축에 1년이 걸릴 정도로 기록향상이 더디다는 종목.
국가대표 코치협의회 회장을 맡을 만큼 선수촌 `터줏대감'이 된 임 코치는 기자를 보며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이거 못해 올림픽에 못 가면 밥숟가락 놔야 하는데…. 이제 마누라 볼 면목이 설 것 같네"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농도 잠시. 임 코치는 곧 "야 다시 뛰어"라고 버럭 소리를 내지른다.
코치 명령에 눈 깜짝 할 사이에 한 바퀴를 돈 이두연은 가뿐 숨을 몰아쉰 뒤 대뜸 "김 기자님. 6월10일이 무슨 날인 줄 알아요"라고 물었다.

엉뚱한 질문에 모른다고 했더니 "이두연이 세상에 뜨는 날"이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10년전인 90년 6월10일 전국육상선수권대회 400m허들에서 황홍철이한국기록을 세웠는데 이제 자신이 신기록을 세울 것이라는 장담이다.

같은 시간 대운동장에는 레슬링 선수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축구를 하고 있다.

"야 정신 딴 데 팔지 말고 뛰어" `거한' 유영태 코치는 선수들과 같이 어울리며 오랜만에 웃음을 보이면서도 좀처럼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레슬러들이 통나무같은 몸을 굴리 듯 공을 차는 동안 트랙 한 켠에서는 앳되고갸날픈 여자빙상선수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뙤약볕 아래에서 헉헉대며 달리기를 한다.

기자가 "육상선수들이냐"고 농담조로 묻자 짜증섞인 목소리로 "빙상입니다"라고내뱉는다.
운동장을 나와 훈련본부를 거쳐 다다른 수영장.

대표선수 납치 자작극 사건과 연맹 집행부 공금유용 및 사퇴파동에 이어 최근엔장희진 대표팀 이탈 파문까지 터지는 등 바람 잘 날 없는 수영의 오창균 감독은 쉰목소리로 기자를 반갑게 맞는다.

최근 언론에 자주 나와 졸지에 선수촌내 유명인사가 됐다는 오 감독은 묻기도전에 "우리 선수들 모두 훈련 잘 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한 뒤 훈련 스케줄을 자세히 설명했다.
대한수영연맹 심홍택 회장의 딸인 여자배영의 심민지(대전체고)도 연신 싱글벙글하며 올림픽 사상 첫 결선 진출을 목표로 훈련에 열심이었다.

선수들에게 대표팀 막내 장희진 얘기를 꺼내자 `덜렁이' 노주희(서울체고)와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의 아들 조성모(경기고)는 "선수촌이 이렇게 좋은데 왜 안 들어오는지 정말 안타깝다"고 `뼈있는' 농담을 했다.

요즈음 선수촌은 더욱 바빠졌다.
곳곳에 붉은 글씨로 쓰인 `시드니올림픽 앞으로 000일' 이라는 숫자가 자꾸만줄어가기 때문이다. 어느덧 내일이면 두자리수로 줄어든다.

84년 LA대회부터 5회 연속 올림픽에 나가는 사격의 이은철(한국통신)이나 탁구의 김택수(대우증권)처럼 선수촌 생활이 지긋지긋해진 고참들 역시 숫자를 보면 마음이 초조해지기는 마찬가지다.

선수들 뿐 만 아니라 협회 임원들도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곳이 D-100일의 태릉이다.
남자 및 혼합 복식에서 금메달 2개를 예약한 배드민턴대표팀은 지난 달 25일 김중수(화순군청) 코치가 운영하는 화순 사슴농장으로 내려가 몸 보신을 한 뒤 4일 입촌했다.

`막판 체력저하로 무너졌다'식의 `상투적' 언론 보도를 피하자는 차원에서 사슴피에다 자라, 뱀탕을 먹었다는 것이 한국 배드민턴의 `대부' 김학석 협회 부회장의 말이다.

그러나 김승곤 선수촌 훈련본부장은 "매주 수요일에는 1인당 2만9천원짜리 특식이 나와 먹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선수들이 흘리는 비지땀으로 젖과 꿀이 흐른다는 태릉은 매일 아침 6시면 대표팀 행진곡인 `나가자 대한건아'와 함께 힘찬 기지개를 켠다.

수영이 입수전 체조를 요하는 종목 특성상 30분 더 일찍 기상하지만 나머지 선수들은 6시10분부터 10분간 실시되는 에어로빅을 통해 몸을 푼 뒤 보통 8시까지 웨이트트레이닝에 치중한다.

중,고등학생 선수들은 빠짐없이 8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학교수업을 받고오후 5시에 복귀, 2시간여동안 강도높은 연습을 갖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노래방과 DDR, 당구장, 스타크래프트 PC방 등 바깥에 있는 웬만 놀이방 시설이 다 마련돼 있다는 것.

매주 최신곡을 사와 노래방 기기에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김성철 훈련과장의 주요 업무중 하나다.
`가자 시드니로 나의 명예와 조국의 영광을 위해' 선수회관에 걸린 현수막을 보는 선수들의 결의에 찬 얼굴을 뒤로하고 기자는 태릉선수촌을 나섰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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