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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도 즐거워 … 공부하러 오는 날이면 아침부터 신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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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부터 대구서부도서관 한글교실 기초반을 다닌 이영훈(73) 할머니는 요즘 한글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오른쪽 사진은 심화반의 받아쓰기 채점 모습. [대구=공정식 프리랜서]

“기자 아가씨는 우째 그리 빨리 쓰노. 내도 그기 평생의 소원인디…”

앞다퉈 이야기하던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자신들의 말을 빠르게 받아 적는 기자의 손과 수첩이었다. “진짜 빠르네 빨라. 게다 어떻게 (수첩을) 안 보고 쓰노.” 할머니들은 기자가 쓰는 걸 한참 바라보더니 다시 생각이 난 듯 자랑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지난 5일 대구서부도서관 한글교실에서 만난 노인들이다.

서부도서관은 대구시내 도서관들 중 유일하게 한글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상반기(3~6월)·하반기(9~12월)로 나눠, 초등학교 1~2학년 수준의 기초반과 3학년 수준의 심화반이 매주 화·수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진행된다. 학생은 주로 평균 65세 이상의 할머니들이다. 인기가 많아 정원(20명)은 늘 초과다. 이번 학기에도 각 반에 24명이 수업을 듣고 있다.

“아이들 키울 때야 먹고 사는 게 바빠 글을 몰라도 그냥 살았는데, 손자들은 아는데 어른인 내가 글을 모른다는 게 답답한 거야. 그래서 작년에 처음 서부도서관을 찾아왔지.” 심화반의 김효순(73·가명) 할머니는 아직도 글을 잘 쓰고 읽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자식들 보기 부끄럽다고 했다. 반면 기초반의 김분남(70) 할머니는 딸이 신청해줘 수업을 듣고 있다. “기초반 선생님이 받침 하나까지 자세히 가르쳐주니까 정말 재밌어. 수업이 있는 날 아침이면 남편이랑 아들이 빨리 공부하러 가라고 한다니까.”

국립국어원이 2008년 전국의 성인 1만2137명(19~79세)을 대상으로 기초문해력(글을 읽고 이해하는 최소한의 능력)을 조사한 결과, 전체 성인의 1.7%가 글을 읽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70대는 다섯 명 중 한 명이 글을 읽고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글을 몰라 겪는 불편함 점으로는 70.9%가 은행이나 우체국 등 관공서를 이용하는 것을 꼽았다. 실제로 기초반 수강생 중 최고령자인 박동순(80) 할머니는 “남편이 죽고 나니 혼자 세금을 낼 수 없어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했다. 심화반의 백영희(61) 할머니는 “이제 은행 일도 내가 직접 가서 볼 수 있고, 시장 갈 때도 필요한 것들을 적어갈 수 있어 정말 편하다”고 말했다.

뒤늦게 스스로 시작한 한글 공부라 열의가 모두 대단하다. 수업의 중반이 넘어간 오전 11시 20분 기초반 강의실, 염해일(65) 선생님은 꼬리잡기, 그림자밟기, 비석치기 등 전통놀이에 대해 한창 설명하고 있었다. “선생님, 근데 시험은 언제 봐요?”하고 할머니 한 분이 불쑥 물었다. 염 선생님은 “시험은 수업 끝나기 전인 11시 40분에 볼 테니, 지금은 같이 따라 읽어 주세요”라고 답했다. 수업시간마다 받아쓰기 시험을 보는데, 매번 평균 95점이 넘는다. 지난 2월 영천여중 교장선생님에서 퇴임한 염 선생님은 “10시부터 수업인데, 어르신들이 9시만 되면 다들 와서 시험 공부를 하고 계신다”고 말했다. 염 선생님은 요즘 수업 중에 알파벳도 하나씩 가르치고 있다. “방학 중에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 비행기 좌석이 ‘1C’ ‘3D’, 이렇게 써 있더라고요. 그래서 어르신들이 기차나 비행기 좌석도 혼자 찾으실 수 있게 알파벳 공부를 시작했죠.”

무료로 운영되는 한글교실의 선생님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다. 염 선생님처럼 퇴직한 선생님들이 많지만 심화반의 김현순(53·여) 선생님처럼 일반 자원봉사자들도 있다. 지난 3월부터 시작해 두 학기째 수업 중인 김 선생님은 “선생님이 자주 바뀌었나 봐요. 지난 학기에는 할머니들이 언제까지 해줄 수 있는지 자꾸 묻더라고요”라고 말했다. 김 선생님을 향한 심화반 할머니들의 애정은 대단하다. 선생님을 줄 간식도 자주 싸오고, 교실 한쪽 벽에는 ‘선생님 가리(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쓴 종이도 붙어있다. “강사료가 없는 자원봉사지만 책임감을 갖고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수업하겠다고 약속했어요.” 현재 김 선생님은 계명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미술상담지도를 공부 중이다. “한글교실을 위해 교수교육법이나 맞춤법 등을 따로 공부하고 있어요. 할머니들께서 절 진짜 선생님으로 우러러 봐주셔서 정말 감사하죠. 할머니들의 공부 열정 때문에 저도 계속 수업을 하러 오게 돼요.”

대구서부도서관 정외태 관장은 “수업이 끝난 뒤에도 열람실에서 공부하는 어르신들이 계시다”며 “이분들이 남은 인생을 보람 있게 살 수 있도록 한글교실을 꾸준히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도서관측은 이들에게 공책이나 연필 등 학용품을 무료로 제공하는 방안도 계획 중이다.

대구=양훼영 행복동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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