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인 복귀' 선언한 '왕회장의 인생']

중앙일보

입력

여든다섯의 왕회장이 53년동안 맡아온 현대그룹의 경영 은퇴를 선언했다.

본인은 물론 정몽헌.몽구 회장도 함께 경영에서 손떼게 함으로써 현대그룹과 鄭씨 집안 사이에 선을 그었다.

쌀가게에서 시작해 현대건설 창업과 그룹 회장 취임, 정치 참여, 대북 사업에 이르기까지 정주영 명예회장의 파란만장한 역정을 돌이켜본다.

'왕발' 이 경영일선에서 떠났다.

54여년동안 현대그룹을 이끌어온 정주영(鄭周永.85) 명예회장이 결국 31일 그의 사업가 인생을 접었다.

지난달 말 현대 계열사내 지분 정리에 이어 주요 계열사 이사직을 내놓은 鄭명예회장은 이날 경영 완전 은퇴를 공식 선언함으로써 '자연인' 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지난해 4월 독일 슈피겔지와의 인터뷰에서 "1백20세까지는 일할 수 있다" 며 노익장을 과시했던 것에 비하면 그의 은퇴는 자신이 바랐던 것보단 빨리 찾아왔다.

그는 오너 중심 체제가 뿌리깊이 박혀있던 현대그룹을 한순간에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시키는 결단력을 보였다.

◇ 근면으로 살아온 역정〓1915년 강원도 통천 아산리에서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난 鄭명예회장은 온갖 역경과 시행착오를 특유의 근면함.굳은 의지로 이겨낸 우리나라의 대표적 자수성가 사업가였다.

자신을 '자본가가 아닌 부유한 노동자' 라 일컫기 좋아했던 그는 언제나 현장에서 근로자들과 생활을 함께 하는 등 노동의 신성함을 몸소 실천했던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의 학력은 소학교(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지만 그의 성실함.결단력은 그를 전후(戰後) 역사상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만들었다.

해방을 전후해 건설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한 그의 인생은 우리나라 경제의 발전사와 궤를 같이 했다.

47년 현대건설을 세운 그는 전후 국내외 건설붐을 타고 회사 몸집을 빠른 시간내에 키웠다.

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한 그는 10년도 안돼 국내 최초로 고유모델 포니자동차를 개발(76년), 한국 자동차 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틀을 잡았다.

鄭명예회장은 자신의 기업 경영에 성공했을 뿐아니라 우리나라의 국가 위상을 높이고 남북 관계를 개선시키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울올림픽 추진 위원장을 맡아 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했으며, 대한체육회장을 맡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 고비 때마다 결단으로 극복〓그의 결단의 역사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열네살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단돈 47전을 들고 친구와 함께 청진으로 떠난 첫 가출과 소 판돈 70원을 들고 서울로 내달렸던 두번째 가출에서 그의 '안되는 일은 없다' 는 신조는 시작됐다.

68년 각계의 비판을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시작했을 때도, 76년 모두가 '안되는 일' 이라며 말렸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만공사를 현대건설이 따냈을 때도 그의 머리속에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는 신념이 박혀있었다.

자동차사업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포드사와 결별하고 독자모델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국내외 많은 전문가들의 시각은 '현대가 자동차 진출은 반드시 실패할 것' 이었지만 정주영은 그것을 해 냈다.

전경련 회장을 다섯번이나 연임한 그는 80년 신군부의 서슬퍼런 퇴진요구 앞에서도 당당히 맞서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올림픽 유치 책임을 맡아 바덴바덴에서 '세울 꼬레아!' 함성이 울려퍼지도록 만들었다.

정치참여 이후 조용한 침묵기를 맞았던 그는 98년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한 '소몰이떼 방북' 을 실현함으로써 화려한 모습으로 국민들 앞에 다가섰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망향 염원이자 민족의 오랜 꿈인 금강산 관광선물을 한아름 안고 휴전선을 넘어 돌아왔다.

◇ 실패의 쓴 맛을 준 정치실험〓6공화국 말 그는 새로운 인생실험에 나섰다.

정부정책에 대한 반발 등으로 국세청이 1천3백61억원의 세금을 추징하자 "돈이 없어서 세금을 못내겠다" 며 납세거부까지 했던 그는 정치자금을 줄 것이 아니라 직접 나서보기로 한 것이었다.

국민당 바람을 일으키며 총선에서는 '승리' 한 그였지만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면서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쓰라린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정치 외도' 에 나섰다가 정권의 괘씸죄에 걸려 문민정부 5년동안 숨죽이며 살았다.

정치 실험 실패는 그의 건강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이후 그는 현대그룹 경영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으면서 대북 경협 사업에만 몰두했다.

◇ 앞으로의 삶〓 '훌륭한 사업가로서 보다는 남북통일에 기여한 인간으로 남고 싶다.'

鄭명예회장은 측근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다. 이제 그는 경영일선에서 아들들과 함께 물러나 대북사업만 전념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사업을 챙기기에는 건강이 따라주지 않는다.

국민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두가지로 갈린다.

'황소' 와 같은 근면함으로 성공한 가장 한국적인 기업인으로 추앙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한때 대통령까지 꿈꿨으며 지나친 욕심을 가진 사업가로 비난하는 부류도 있다.

그러나 현대그룹내에서의 그의 위상은 절대적이다. 그들이 스스로 일컫는 '현대 정신' 이란 결단→근면→돌파를 뜻하는 '정주영 정신' 그 자체였다.

이 때문에 이날 鄭 명예회장의 은퇴 선언을 바라보는 현대 직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은퇴 연설을 대독한 김재수 본부장은 은퇴 배경을 설명하면서 눈물을 비치기도 했다.

많은 현대 직원들은 "그동안 명예회장의 건강.판단력을 두고 말들이 많았는데, 시대를 뚫어보는 명예회장의 통찰력은 뛰어났음이 입증됐다" 며 "현대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장 현명한 길을 제시한 명예회장은 존경받게 될 것" 이라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