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민의 부자 탐구 ③ 부자의 고민 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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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한때 우리 사회에서 ‘오렌지족’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돈 많은 부모를 둔 자녀의 철없는 모습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지금도 서울의 압구정동이나 청담동 거리를 거닐다 보면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멋진 카페에서 영어 몇 마디 하면서 친구들과 노닥거리거나, 클럽이나 와인 바에서 값비싼 술을 자연스럽게 마시는 젊은이들이다. 각종 럭셔리 제품들로 꾸미는 것은 기본이다. 이런 젊은이들은 보통 ‘배고픈 부자’의 마음을 가진 부모를 두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배고픈 부자들은 무엇보다 자신들이 모은 부를 자기 자식에게 전달하려 한다. 그리고 자신과는 다른 사회계층에 자식이 속하기를 원한다. 사회적 신분 상승이다. 자식들은 배고픈 부자가 아닌 품격 부자의 수준에서 살 것을 바란다.

 우리 사회에서 ‘배고픈 부자’들이 추구하는 신분상승의 염원은 과도한 사교육 열풍까지 만들어 냈다. 과거 언론에 심각한 사교육 문제로 소개됐던 고액 ‘벼락 과외’ ‘찍기 과외’의 진앙지다. 조기 유학이나 명문대 진학 열풍도 배고픈 부자들이 주도했다. 돈으로 교육시키는 이런 풍조는 ‘교육=부모의 경제력’이라는 통념을 낳았다. 배고픈 부자들은 자녀의 교육을 위해 유학(留學)을 선호한다. 이들 자녀들의 유학은 ‘외유(外遊)’가 되기 쉽다. 공부가 아닌 학벌을 수집하는 하나의 방편이자, 유사한 형편의 사람들과 사귀는 방안이다. 배고픈 부자의 자녀들은 이렇게 또 다른 상류층을 만들어 간다.

 

부모가 배고픈 부자의 심리에 충실할수록, 자녀는 ‘철부지 부자’의 심리코드를 가진다. 이 사회에서 부자의 문제가 부자(父子)의 문제가 된다고 믿는 한국인의 심리다. ‘철없는 부자’의 심리코드를 가진 사람들은 무엇보다 부모가 만든 부를 통해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 한다. 다른 사람과 다른 특별한 무엇을 자신이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쉽게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우긴다. 비호감의 인물이지만, 돈이 만들어 내는 영향력에 의해 스스로를 ‘호감형 인물’로 착각한다. ‘돈’은 이들에게 태어나면서 있었기에, 단지 소비의 ‘대상’이다.

 지난 10년 사이에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획기적으로 바뀐 부자에 대한 생각 중의 하나가 바로 철없는 부자에 대한 인식이다. 무엇보다 ‘꽃보다 남자’ ‘시크릿 가든’ 등과 같은 드라마가 대중의 마음을 잡았다. 재벌 2세의 동화 같은 드라마나 연애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현실에 찌든 많은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철없는 부자라도 좋다. 나와 어떤 관계가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이 더 좋다”는 심리다. ‘부를 향한 한국인의 강렬한 로망’이 만들어낸 또 다른 사회 변화다.

 몇 해 전 한 부잣집 아들이 술집에서 시비가 붙은 폭행 사건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화끈하게 자신의 귀한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 술집 종업원들을 손봐 줬다. 이런 경우에도, 일부 사람은 자신의 철없는 아들을 귀하게 대하지 않은 인간들을 혼내준 부자 아버지를 부러워했다. 철부지 부자의 심리코드에는 부자(富者)가 부자(父子)의 문제가 되는 이유가 숨어 있다. 부부 불화, 불륜, 숨겨둔 자식 등 ‘막장 드라마’의 소재와 같은 내용들이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경주 최부자댁의 이야기를 잊지 않는다. 부자의 ‘사회적 책임’도 그렇지만, ‘철없는 부자(父子)’를 경계하는 진짜 부자 아빠들이 가슴에 새겨둔 교훈이었기 때문일 게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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