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에 빠진 한 인간을 위하여 어둠의 장막을…

중앙일보

입력

"잘 가오! 잘 가오!" 지바고는 그 순간을 기다려 소리없이 되풀이했다.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속삭임이 차가운 저녁 공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잘 가오, 영원히 떠나가 버린, 오직 하나 내 사랑이여!"
이윽고 썰매는 쏜살같이 자작나무 사이를 달려 올라갔다.
"아, 저기 가는구나, 저기!" 그가 파리한 입술로 이렇게 속삭이고 있을 때, 썰매는 갑자기 속력을 늦추며 마지막 자작나무 옆에 멈추어 섰다.

'아아, 이 가슴의 고동 소리! 미칠 듯 뛰노는 심장이여! 두 다리에서 힘이 쑥 빠지고, 마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슈바처럼 온몸이 금세 쓰러질 것만 같구나! 하나님, 라라를 제게 도로 돌려주시려는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저 멀리 석양 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왜 가지 않고 멈춰 섰을까? 아니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이 집에 이별을 고하려고 썰매를 세워달라고 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뒤쫓아오는지 확인하려고 한 것일까? 다시 떠나버렸어.'

다행히 해가 먼저 넘어가지만 않는다면(어두워지면 볼 수가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골짜기 저편 공지에, 그저께 늑대떼가 몰려왔던 곳에 또 한 번 썰매가 얼른 나타날 것이다.

이윽고 그 순간이 오고 또 지나갔다. 검붉은 태양은 아직도 눈에 덮인 푸른 지평선 위에 둥글게 빛나고, 눈은 달콤한 파인애플빛의 광선을 굶주린 듯 빨아들이고 있었다. 썰매는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듯 퍼뜩 나타나서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잘 가오, 라라! 저승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나의 사랑이여, 끝없이 영원한, 그치지 않을 나의 기쁨이여. 안녕, 안녕!'

마침내 썰매는 아주 사라져버렸다.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두 번 다시 라라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둠이 깃들이기 시작했다. 눈 위에 여기저기 깔렸던 구리빛 노을의 반점이 이내 퇴색되고 사라져갔다. 부드러운 잿빛 공간이 재빨리 라일락빛 황혼에 잠기면서 차츰 자주빛으로 변했다. 가느다란 레이스처럼 꼬불꼬불한 자작나무 가지가 갑자기 핏기를 잃은 듯 불그레한 하늘에 섬세한 선을 그리고 있었으나, 이내 잿빛 안개 속에 녹아 들었다.

애수는 지바고의 감각을 한층 더 예민하게 했다. 그는 열 배나 더 날카로와져서 주위의 모든 것을 포착했다. 그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심지어 공기까지도 희귀한 자질을 지니고 있는 듯싶었다. 겨울 밤은 호의를 지닌 증인인 양 동정어린 입김을 내뿜고 있었다. 마치 이때까지 어두워진 적이라곤 없었는데, 지금 홀로 고독에 빠진 한 인간을 위하여 오늘 처음으로 어둠의 장막을 내리는 듯싶었다. 지평선을 등진 언덕의 수목들은 단순한 주위의 전망이 아니라, 마치 그에게 동정을 베풀기 위해 방금 땅속에서 솟아오르기라도 한 것같이 보였다.

지바고는 억지로 동정을 베풀려는 무리를 피하듯 그 순간의 선명한 아름다움에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빛을 뻗쳐서 저녁놀을 향해 '고맙소, 하지만 필요 없어.'하고 속삭이고 싶었다.

그는 뒤돌아서서 현관문을 응시하며 여전히 현관에 서 있었다. '나의 밝은 태양은 져버렸어.'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솟구쳐오르는 눈물이 목구멍을 막아서 이 짤막한 몇 마디도 제대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닥터 지바고〉(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 범우사, 461∼463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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