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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다섯에 가부키 배우 선언, 전통 이으려는 열정이 준 감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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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호 05면

일본 드라마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은 몰라도 얼굴만은 기억할 것이다. 오다기리 조의 팬이라면 영화 ‘유레루’에서 동생에 대한 애증으로 고뇌하던 형을, 기무라 다쿠야의 팬이라면 드라마 ‘미스터 브레인’의 과격한 형사아저씨를 떠올리면 된다. 일본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영화 ‘내일의 조’의 애꾸눈 사부 단페이나, ‘20세기 소년’의 요네자와 역할이 인상적이었을 수 있다. 최근 오리콘 스타일이 실시한 ‘최강의 명조연’ 설문조사에서 압도적으로 1위에 오른 배우, 가가와 데루유키(45·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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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최근 일본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지난달 말 갑자기 기자회견을 열어 “가부키 배우가 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의 9살 된 아들 마사아키 군도 함께 가부키에 입문한다. 가부키는 이치카와·나카무라 등 명문 집안을 중심으로 수백 년씩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는 일본의 전통 공연예술로, 하고 싶다고 해도 쉽게 입문할 수 없는 폐쇄적인 분야다. 게다가 보통 가부키 가문의 자제들이 연기를 시작하는 나이는 만 3세. 따라서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활동하던 40대 중반의 중년 배우가 돌연 가부키 입문을 선언한 것은 다소 황당한 뉴스였다.

알고 보니 가가와는 가부키 명문가의 버림받은 자식이었단다. 그의 아버지는 가부키의 현대화를 이끌어온 ‘수퍼 가부키 배우’ 이치카와 엔노스케. 어머니는 다카라즈카 극단 출신의 여배우 하마 유코다. 하지만 한 살 때 아버지의 불륜으로 부모가 이혼한 후 그는 아버지와 연을 끊은 채 어머니 손에 자라났다. 아들이 예능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기를 원한 어머니의 바람에 따라 명문인 도쿄대 문학부에 입학했지만, 고민 끝에 졸업과 동시에 배우의 길로 들어선다. 배우가 되자마자 제일 먼저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아들이 없다”고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그는 늘 가부키 배우의 삶을 꿈꿔왔던 모양이다.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할수록 ‘일본 예능의 원점’인 가부키에 대한 열망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2004년 아들이 태어나면서 ‘가부키 집안의 대를 잇겠다’는 결심을 했고, 뇌경색으로 쓰러져 활동을 쉬고 있는 아버지를 찾아가 극적으로 화해했다.

그의 연기력은 이미 ‘일본 최고’로 인정받는다. 최근 몇 년간 수많은 화제작에서 악역에서 코믹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하면서 일본 아카데미상, 일본 드라마 아카데미상 등 각종 시상식의 남우조연상을 수년째 독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가부키 배우로도 성공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내년 6월 도쿄에서 가부키 배우로서의 첫 데뷔 무대를 가지겠다고 발표하자 “아무리 명배우지만 가부키의 깊이 있는 표현들을 몇 개월 만에 익히겠다는 것은 오만”이라는 회의적인 반응도 나왔다. 그러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나이에도 멈추지 않고 도전하는 그의 자세, 점점 쇠락해가는 전통문화를 잇겠다는 굳은 결의는 일본인들에게 더할 수 없는 감동을 안기고 있다. ‘위대한 도전’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그의 가부키 무대가 한없이 기대되는 이유다.


중앙일보 기자로 일하다 현재 도쿄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하고 있다. 아이돌과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을 학업으로 승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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