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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김종록 연재소설 - 붓다의 십자가 2. 서쪽에서 온 마을 (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0면

<지난 줄거리>

서기 1231년 몽골이 고려를 침략한다. 이듬해 고려 조정은 수도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하는데 대구 부인사에 모셔져 있던 고려대장경이 몽골군에 의해 불타고 만다. 무신정권 집정 최이와 불교계, 재상 이규보 등은 총력을 기울여 대장경을 다시 새기기로 한다. 1248년 봄, 서른아홉 살 난 나(지밀)는 강화도 선원사 대장도감에서 팔만대장경 판각 불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어느 날, 고려국 최고의 각수장이 승려 김승이 동방기독교 경교(景敎)의 ‘마리아와 이수 이야기’가 새겨진 엉뚱한 경판을 올려보내온다. 대장도감 감찰이 된 나는 수기 스승의 시자, 인보와 함께 배를 타고 남해를 거쳐 김승의 공방이 있는 변산으로 조사를 나선다. 남해 분사대장도감에서 여흥을 즐기던 그날 밤, 수백 장의 경판이 도난당한다. 때마침 명필로 알려진 탁연이라는 필경사 감독 스님이 종적을 감춘다. 나는 무신정권 집정 최이의 아들이 주지로 있는 단속사를 거쳐 변산에 다다른다. 김승의 마을이 바라보이는 고갯마루에서 무시무시한 돌개바람을 만난 나는 말과 함께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떨어지는 괴변을 당한다. 그 충격으로 말은 죽고 나는 눈이 멀어버린다. 촌장인 김승은 산기도를 떠나 없고 인보는 광대패들이 온 그날, 마실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악몽 같은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뜻밖에도 남해에서 달아난 탁연을 만난다. 인보가 죽었다는 비보가 전해지고 연못가에서 인보의 시신을 확인한다. 독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보의 옷 주머니에서 백부 유승단의 편지가 발견된다. 당대의 문인을 대표했던 백부와 교활한 경교도 김승의 교류는 나에게 충격을 준다.

일러스트=이용규 buc0244@naver.com

백부와 김승이 편지를 주고받은 임진년은 내가 스물세 살 때였다. 물론 나는 그때 부인사에 딸린 암자에 있었다. 대장경이 불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백부가 위독하다는 급보를 들었다. 몽골군 점령지 넘어 강화도 가는 길은 험난했다. 백부를 하늘의 북두칠성처럼 떠받들던 나는 겁도 없이 천리 길을 달려 적진을 뚫었다.

 ‘얘야, 이젠 제법 중물이 들었구나. 장성한 네 얼굴에서 내 아우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고맙구나. 그리고 미안하구나. 이왕 발 들여놓은 거 중노릇 똑바로 해보거라. 종교란 무지렁이들에게는 사실로, 현자에게는 웃음거리로, 통치자들에게는 유용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법이다만 진실한 수행자는 누가 뭐래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단다. 그러다 보면 높은 정신세계에 다다를 수 있겠지. 그 어느 때보다 세상이 뒤숭숭하다. 어수선한 세상사에 휘둘리지 마라. 현실정치도 종교의 본령도 모두 잃고 허깨비 같은 인생이 되기 쉬우니라’.

 병석에 누운 백부 유승단이 내게 한 말씀이다. 백부는 요절한 아우의 아들인 나를 많이 아꼈었다. 과거에 급제하고도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내 선친의 비운은 끝내 나를 절집으로 내몰았는데 백부는 그걸 늘 안타깝게 여겼다. 당신이 무인정권 세력과 맞서며 위험천만한 칼날 위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는데 조카를 관직에 불러들일 수는 없었다. 나는 문관 벼슬 대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시험을 치는 승선과를 택했다. 문인의 길보다 훨씬 안전하고 쉬운 삶이었다. 이 수상한 시절에 나처럼 일찍이 꿈을 접고 청산에 숨어서 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흔했다. 절집이 지나치게 커지고 화려해져 가는 걸 못마땅해 하던 백부는 내가 중이 되는 걸 묵인하는 것으로 내 가는 길을 인정해 주셨다.

 ‘어수선한 세상사에 휘둘리지 마라. 현실정치도 종교의 본령도 모두 잃고 허깨비 같은 인생이 되기 쉬우니라’.

 나는 지금까지 백부의 그 유언을 지키려고 애써 왔다. 중노릇 똑바로 하려고 마음을 다잡아 왔다. 무지렁이들에게는 사실로, 현자에게는 웃음거리로, 통치자들에게는 유용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종교의 본질도 잊지 않았다. 부인사 대장경이 몽골군에 의해 불타버렸다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백부와 김승이 주고받은 편지에는 세상이 모르는 사건의 내막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얼까. 백부의 날카로운 통찰에 비춰보면 지금껏 무지렁이들은 사실로 믿었고 현자들은 웃음거리로 여겼으며 통치자들은 유용하게 활용했다는 얘기가 된다. 나는 몽골군이 대장경을 불태웠다는 걸 분명한 사실로 믿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지렁이인가?

 최씨 무인정권을 뇌꼴스럽게 여기는 나도 불교계에서는 권력을 누리는 편에 속한다. 이렇게 눈이 멀어서도 나는 이 변방 산골마을 사람들에게 명령할 수 있다. 황제가 내린 은제 인장을 가진 감찰이자 대장도감 승정이라는 막강한 권력의 이름으로!

 나는 내심 부끄러웠다. 무인정권에는 맞서지 못하면서 알량한 종교권력으로 중생들 앞에서 군림하는 내가 못마땅했다.

 그나저나 김승은 왜 백부에게 사건의 내막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던 걸까. 백부는 당시 해인사 소속 승려였던 김승과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도 정작 부인사 소속인 내게는 그 내막을 입도 뻥긋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던 걸까. 김승은 분명 내가 백부 유승단의 조카임을 알고 있을 게다. 나만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빨리 김승을 만나봐야겠습니다. 그가 필요하오. 사람들을 풀어 그를 찾아오도록 하세요.”

 나는 탁연에게 정중한 말투로 부탁했다.

 “여부가 있겠소이까. 날이 저물도록 찾아다녀서 늦어도 내일 새벽까지는 지밀 승정과 마주앉게 하리다.”

 내 말투가 다소곳해지니까 탁연도 고분고분하게 나왔다.

 “그리고 어제 오후부터 인보 스님이 다녔던 곳들을 차례로 추적해 볼 참이오. 빈틈없는 동선(動線)을 그릴 수 있도록 목격자들도 찾아주시오.”

 “물론 그렇게 해드리지요. 지밀 승정, 잘 생각하셨소. 승정은 현명한 결단을 내린 거요.”

 탁연은 여전히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김승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전 장군, 어제 왔던 그 의원 영감을 부르시게.”

 “그 영감 여기 와 있다오.”

 꼬장꼬장하던 의원 영감이 어느새 현장에 와 있다가 그렇게 고한다.

 “의원 영감, 이 호박엿에 무슨 독이 든 것 같소?”

 “그건 알 수 없소. 다만 혀와 입술 상태로 보아 이 스님은 유도화(柳桃花) 독으로 죽은 것 같구려.”

 “유도화?”

 “버드나무 잎에 복숭아꽃이 피는 특이한 나무요. 맹독성이 있는 걸 모르는 사람은 그 꽃이 뿜어내는 향기와 황홀경에 취하여 자칫 맨손으로 꺾을 여지가 많소. 피부에 닿으면 염증이 번지고 미량이라도 먹게 되면 설사와 구토를 일으키는 맹독성 식물이오. 심하면 목숨을 잃지요.”

 “우리 고려에 그런 독초도 있었습니까?”

 “십여 년 전, 천축국 무역상이 가지고 온 걸 이 약초골에 번식시킨 것이오.”

 “약초골이 어딥니까?”

 “이 근처올시다.”

 “그처럼 위험한 독초를 뭣하려고 번식시켜요?”

 “이독제독(以毒制毒) 아니겠소이까. 파리며 모기, 그 밖에 사람을 해치는 것들을 쉽게 제거할 수 있으니 잘 다루면 유익하오. 약물을 우려내 병에 담아뒀다가 아무 때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오. 측간 같은 데는 한 가지만 꺾어서 넣어놔도 고자리 같은 벌레들이 안 생기오.”

 듣고 보니 이 마을에 온 어제부터 파리와 모기를 접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유도화를 꺾은 손으로 호박엿을 붙잡고 먹다 탈이 생겼다는 얘긴가? 전 장군, 그렇다고 그 미량의 독에 의해 인보처럼 건장한 사람이 죽기야 할까? 난 납득이 안 간다네.”

 “그건 좀 그렇습니다.”

 나는 호박엿을 떼어내 송사리가 사는 개울물에 풀어보라고 했다. 약초꾼 집 앞 실개천으로 나와 호박엿을 풀었다. 송사리들은 호박엿을 떼어먹기도 했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사람들은 밤새 연못에 잠겨 있어서 독성이 다 빠진 거라고 입을 모았다.

 “대체 우리 인보가 그 위험한 약초골에는 왜 간 걸까?”

 “글쎄요. 어서 목격자가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엿을 팔았던 엿장수도 데려오도록 하오.”

 “광대패들이 묵고 있는 삼거리 주막집 근처니까 그리로 가보시죠.”

 나는 인보의 시신을 보존해 두고 싶었다. 내가 언제 눈을 뜨게 될는지는 모르지만 내 눈으로 직접 인보의 주검을 보고 싶었다. 그런 다음에 화장해야 옳았다. 문제는 여름철이라 시신이 곧 부패한다는 거였다.

 “전 장군, 인보를 이대로 장사지낼 순 없는 일이네.”

 “며칠 정도는 말끔히 보존할 수 있소이다.”

 의원 영감이 자신했다.

 “이 푹푹 찌는 여름날에 무슨 수로요?”

 “독한 몽골 소주로 연근(蓮根)을 우려내 그 물에 적셔두면 아무리 상하기 쉬운 여름날이라도 이레는 끄떡없소. 냉기가 나오는 동굴 속에서는 보름도 더 갈 거요.”

 믿기지 않았지만 흰소리로 들리지는 않았다. 의원 영감에게 인보의 주검을 보존처리하라고 맡겼다. 탁연은 사람들을 풀어서 김승이 있을 만한 데로 보냈다.

 우리는 청림 삼거리 주막집으로 나왔다. 인보의 죽음으로 광대패들은 더 이상 놀이판을 벌이지 못하고 주막집에서 빈둥대고 있다가 우리를 맞았다. 주막집으로 목격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자 탁연은 인보의 행적을 치밀하게 추적해 나갔다. 옆에서 듣기에도 빈틈이 없었다. 나는 광대패들을 불러모아 놓고 물었다.

 “꼭지가 누구냐?”

 “저희들입죠.”

 건장한 쌍둥이 형제라고 했다.

 “들어 알고 있겠지만 어제 너희들을 따라다닌 내 부하 승려가 죽었다. 인상에 남아있더냐?”

 “처음엔 전혀 몰랐어요. 따라다니는 사람이 아주 많았으니까요.”

 “나중에는 알게 되었다는 얘기로구나.”

 “광대패 놀이가 흥미로워서가 아니라 우리 형제의 뒤를 밟는다는 걸 알고 오히려 우리가 물었습죠. 왜 우리만 따라다니느냐고요.”

 “그랬더니?”

 “우리 쌍둥이 형제를 강화도에서 본 것 같다고요.”

 “강화도에서 왔더냐?”

 “당연히 이 나라 수도인 강화도에서도 지낸 적이 있지요. 우리 같은 광대패들이 안 가는 데가 있나요? 전국을 떠돌며 밥벌이하는 놈들인걸요.”

 나는 인보의 성격을 잘 안다. 인보는 실없이 광대패를 따라다닐 화상이 아니다. 어제 그처럼 달뜨고 신났던 데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다.

 “강화도에서 머문 때가 언제더냐?”

 “봄까지 머물다 초여름에 뭍으로 건너와 아래로 훑어내려 왔습죠.”

 “너희들을 강화도 어디서 봤다고 하더냐?”

 “뜬금없이 지난 초파일 전야 연등회 사건을 말하더군요. 저희들도 깜짝 놀랐답니다.”

 “연등회 사건? 시전거리에서 등대가 넘어져 집정 최이와 최항 부자 가마에 불 붙은 사건 말인가?”

 “예. 승정어르신은 어떻게 아세요?”

 “너희들 쌍둥이라고 했것다. 물동이로 최이 집정 가마의 불을 껐었지?”

 “….”

 쌍둥이 형제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하다.

 나는 그 광경을 바로 뒤에서 보았다. 김지양이라는 어여쁜 비구니 하나가 등대를 붙들고 넘어지는 바람에 최씨 부자 가마의 비단 장식이 불탔다. 쌍둥이로 보이는 장정 둘이 가게 앞에 놓여 있던 나무 물동이로 불을 껐다. 쌍둥이 얼굴이 떠올랐다. 최항이 성난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렸고 호위무사의 증언으로 무사히 풀려났던 걸 뚜렷이 기억한다. 인보는 수기 스승을 모시고 그 연등회에 참석했었다. 그런데 그자들을 이 마을에서 만났으니 왜 관심을 보이지 않았겠는가.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전 장군, 그대가 이자들은 처음 본다고 하지는 않겠지?”

 “….”

 “탁연 스님도 마찬가지겠지요?”

 “….”

 “물론 광대패들 모두를 잘 알 것이오. 어쩌면 이 마을사람들 모두가 다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왜냐하면 광대패들이 이 마을사람들이기도 할 테니까.”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전추산과 탁연이 한동안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잘 보셨소이다. 어떻게 그걸…?”

 탁연이 물었다.

 “연등회 사건이 터진 날 밤, 물을 뒤집어 쓴 최씨 부자와 가마꾼들은 피부에 염증이 번지고 설사와 구토가 났지. 괴질로만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방금 알았소. 아까 의원 영감이 이르길 유도화가 피부에 닿으면 염증이 번지고 미량이라도 먹게 되면 설사와 구토를 일으킨다고 했소. 이자들이 들이부은 나무 물동이에는 아마도 유도화 우려낸 독이 들어있었을 것이오. 죽은 인보 스님이 그것까지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자들을 수상쩍게 여긴 건 분명하오. 이자들은 그런 인보 스님이 불편했겠지.”

 나는 번개 같은 직관으로 상황을 재구성했다.

 “우리는 그 스님을 절대로 죽이지 않았어요.”

 쌍둥이 형제가 입을 모아 외쳤다.

 “전 장군, 이자들을 포박하라! 함께 약초골로 갈 것이다.”

김종록 소설가
일러스트=이용규 buc02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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