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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이 올라탄 대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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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올 초 세계적 뉴스는 아랍 민주화였다. 최근 세계적 뉴스는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미국 청년들의 시위다. ‘아랍의 봄’에서 ‘뉴욕의 가을’까지 2011년 빅 뉴스엔 일관된 흐름이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의 등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아랍의 모래폭풍이 잦아든 지난여름 미국의 외교전문잡지인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미국인 국제정치학자가 자기반성의 글을 기고했다. ‘왜 중동전문가들은 아랍의 봄을 예상하지 못했나’라는 제목이다. ‘견고한 독재체제가 어떻게 유지되나’라는 낡은 화두에 얽매인 바람에 ‘변화의 물결’을 놓쳤다고 한다. 타성에 젖은 시각으로는 변화의 저류(低流)를 포착하기 어렵다.

 아랍의 봄을 불러온 변화의 저류는 ‘사회적 양극화’다. 같은 독재임에도 불구하고 나눌 것이 없는 빈국(貧國)과 넉넉히 나눠가질 수 있는 산유국(리비아는 예외)은 혁명의 태풍을 피했다. 혁명의 불길이 치솟았던 이집트와 튀니지는 대표적인 경제개혁·개방 국가다. 서방의 원조를 받으면서 신자유주의 경제를 막 배우던 나라들이다. 갑자기 부자가 생긴 반면 정부 보조가 줄어들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은 더 어려워졌다. 분신한 노점상은 혁명의 아이콘이자 양극화의 상징이었다.

 또 다른 변화의 흐름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의 등장이다. 기술의 변화가 생각을 바꾸고 사람을 움직였다. 이집트와 튀니지는 아랍국가 가운데 SNS 보급률이 가장 높은 곳이다. 역시 개혁·개방의 영향이다. 신자유주의의 수혜자인 중산층 지식인이 SNS 혁명의 중심에 섰던 점도 주목해야 한다. 아랍의 ‘강남 좌파’인 셈이다.

 ‘뉴욕의 가을’은 서구판 ‘아랍의 봄’이다. 한여름 영국과 프랑스를 휩쓸었던 청년 시위가 신자유주의의 심장인 뉴욕 월스트리트를 점령했다. 월스트리트를 행진하는 시위 청년들이 ‘우리는 99%다’라고 외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나머지 1%의 부자를 향한 분노의 표현이다. 계급이란 개념이 없는 나라에서 ‘계급투쟁’이란 낡은 표현이 되살아날 정도다. 여기에서도 SNS의 역할은 돋보인다. 시위청년들을 내려다보며 샴페인을 마시고 사진을 찍는 월스트리트 금융종사자들을 찍은 동영상이 SNS를 타고 분노를 확산시킨다.

 이제 박원순 변호사의 등장을 보는 눈도 교정할 필요가 있다. 많은 전문가는 ‘정당 없는 시민후보’의 가능성에 회의적이었고, 타당성에 비판적이었다.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될 수 없는 이유’와 ‘되어선 안 되는 이유’에 더 주목했다. 그러나 박 변호사는 제1 야당 후보를 이겼다. 정치학자들의 결정적 의문, ‘돈과 조직이 있느냐’에 대해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단숨에 법정선거비용 38억원을 모았고, 아날로그 정치의 상징인 ‘체육관 선거’에서 민주당 못지않은 지지자들을 동원했다. SNS로 돈과 조직을 창출했다.

 무엇보다 박 변호사는 양극화에서 비롯된 ‘불만의 흐름’을 타고 있다. 제도권 정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상황에서 ‘불만의 흐름’은 새로운 출구를 찾은 셈이다. 박 변호사의 등장은 예고돼 왔다. 우리나라 비정부기구(NGO)들은 매우 정치적이다. 박 변호사는 이미 11년 전 낙천·낙선 운동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구사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박 변호사는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다. 준비된 NGO 대표로서 양극화라는 불만의 흐름을 타고 SNS로 무장했다.

 박 변호사의 등장은 정당의 위기일 뿐 아니라 보수의 위기다. 진보의 빠른 발걸음에 보수가 뒤처지고 있다. 검증을 통해 박 변호사를 낙마시키겠다는 보수의 전략은 근시안적이다. 박원순이 아니라 그가 올라탄 시대적 흐름이 보수가 직면한 위기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은 끌어안아야 한다. 보수는 지키기 위해 변해야 한다.

오병상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