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번째 편지 〈5월의 제주에서(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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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결혼 1주년을 맞아 여행 온 친구 부부가 이곳 성산에 다니러 왔습니다. 그들과 섭지코지에서 해녀가 직접 잡은 우럭, 자리, 놀래기, 따돔, 소라, 오분자기 회를 안주로 바닷가에 앉아 소주를 두 병 마셨습니다.

5월의 제주 바다는 연두, 초록, 감람빛으로 시시각각 변해가며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덧없음을 일깨워줍니다.

마음 어디가 지쳐 있는지 때로 격한 슬픔이 찾아와 아무 데나 드러눕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마침 그럴 때 그들 부부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런 순간엔 혼자도 여럿도 힘이 듭니다. 선글라스로 눈을 감추고 투명한 소주를 거푸 들이켜며 꿈틀대는 흰 접시 위의 오분작이를 내려다봅니다.

오분작이는 전복과 아주 흡사하게 생겨서 볼 때마다 매번 햇깔립니다. 더군다나 껍질만으론 구분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전복과는 맛이 다르고 값도 두 배 정도 차이가 납니다. 전복이 비싼 것입니다. 한가지, 오분작이는 일정한 크기가 되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번에 제주에 내려와 알게 된 새로운 사실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며칠 전 빵집에 가서 아침에 커피와 먹으려고 모닝빵을 사왔습니다.

그런데 안에 일명 앙꼬라고 하는 단팥이 듬뿍 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담배를 줄이기 위해 가끔 사탕을 입에 물고 있을 때가 있지만 저는 단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앙꼬가 들어 있는 모닝빵은 처음이어서 세든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제주도 사람들은 단팥을 무척이나 좋아해 심지어는 제사상에도 빵을 올려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제주도 사람들은 고양이를 각별하게 생각합니다. 흰두교도들이 소를 대하듯 고양이를 건드리는 것은 절대 터부시합니다. 아마도 잡귀를 막아내는 영물로 여기는 듯합니다.

또 하나 이곳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남의 집에서 밥을 먹지 않습니다. 밥때엔 절대 남의 집에 찾아가지 않습니다. 그 집의 식량을 축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이 집 주인이 낚시를 해서 광어 몇 마리를 잡아왔답니다. 부부가 둘이 먹기가 뭣해 옆집 할아버지를 초대했더니 양복을 입고 와 구경만 하고는 도망치듯 가버리더란 얘깁니다.

문화의 집단무의식은 이렇듯 오래고 질기디질긴 것입니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제주도엔 도둑이 없습니다.

이곳 성산에 머무는 동안 서귀포에 세 번 다녀왔습니다. 집을 알아보려고 말입니다. 실은 제주에 얼마쯤 내려와 살고 싶어 서귀포 신시가지에 있는 아파트 단지를 뒤지고 다녔는데 아무래도 집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전세는 세입자가 집을 구하기 위해 〈벼룩시장〉에 광고를 낼 정도였습니다. 알고보니 제주도 사람들은 구정 새해 때(신구간) 일제히 이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구정 전 보름 동안 하필이면 가장 추울 때 서로 집을 바꿔 이사를 하는 것입니다.

'신구간'은 제주의 모든 귀신들이 움직이는 시기라고 합니다. 그때 사람도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같은 나라인데도 이런 문화 차이가 있다는 것이 매우 새삼스럽고 신기하게 생각됐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아파트 광고를 하는 걸 봐도 입주 시기는 역시 '신구간'입니다. 집을 사고파는 것도 대개 그 시기에 이루어집니다. 외지인은 아무 때나 이사를 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사 얘기를 하자 친구 부부는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더군요. 왜. 뜻없이 외롭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밤엔 그들 부부가 마련한 저녁상에 초대를 받아 닭도리탕에 또 소주를 마셨습니다. 술을 마시는 동안 먼 데서 휴대폰으로 전화가 몇 통 걸려오고 그곳은 서울이었고 그립지 않은 곳이지만 사람 때문에 문득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자정이 넘어 〈바닷바람〉으로 돌아와 양치만 하고 겨우 잠이 들었습니다.

오늘 아침엔 그들 부부를 안집 아주머니가 초대해 밥을 차려주었습니다. 차를 한잔 마시고 그들을 정오에 서울로 떠나 보내고 돌아와 오후 내내 긴긴 잠을 잤습니다.

밤에 일어나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중의 하나인 〈피카소-성스러운 어릿광대〉를 읽다가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허준〉이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밤바다에 잠깐 나갔다 옵니다.

오늘 밤은 무섭도록 바다가 조용합니다. 파도소리도 한점 들려오지 않습니다. 배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엔 띄엄띄엄 가로등만 몇 개 켜져 일본 목판화 속을 무겁게 칼자국처럼 걷고 있는 듯합니다.

빈탄을 떠나온 지 그새 한 달이 다 돼 갑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새 죄 기억나지 않습니다. 지금 막상 뚜렷한 것 하나는 내 삶에 뜨겁고 커다란 폭풍이 그때 불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곳 제주에 내려와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각자 나그네인 우리가 그때 여로에 우연히 하나였고 그래서 내가 지금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쑤욱 빠져나가 매미껍질처럼 내 존재의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5월 말에나 서울로 올라갈 듯합니다. 이사는 어쩐지 점점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이곳은 외지인이 오래 살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운 곳입니다.

농담 한마디를 하자면 제주도의 영문 이니셜은 WWW가 아닐까 싶습니다. 즉 What A Wonderful World 말입니다. 그러나 역시 풍경의 아름다움은 사람 목숨을 끝없이 속절없고 덧없게 합니다.

내일은 들판을 뛰어다니며 종일 몸이라도 학대하고 싶습니다. 빈탄에서 돌아와서부터 불현듯 사라진 내 몸의 무게를 느껴보고 싶습니다. 그 무게가 어딘가로 옮겨갔다면 그나마 다행일 텐데 혹시 바람 속으로 빠져나가 버린 것은 아닌지 내심 두렵습니다.

서울에 올라가서는 곧 일본에 며칠 다녀와야 할 듯합니다. 떠나기 전에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당신 대답이 아니라 내 대답을 잘 모르겠습니다.

목판화의 뚜껑을 힘겹게 덮습니다. 저 칼날 속의 너무 많은 꽃들. 어제 내가 생으로 죽여 먹은 바다 고기들. 살면서 내가 상처준 그 모든 가녀린 것들. 피카소의 〈게르니카〉 혹은 그가 청색시대에 그렸던 〈맹인의 식사〉 혹은 〈자화상〉.

날마다 푸른 바다 옆을 지날 때면 늘 듣곤 하는 조수미의 새 앨범 〈Only Love〉. 너무 희미한 그대. 그날 밤 네 눈에서 까마득히 흐르던 한줄기 눈물. 잘 벼린 칼에 대한 열망. 내 마른 몸에 그 칼로 이 밤의 풍경을......

오, 밤이여, 용서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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