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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女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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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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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칠성이는) 두 팔을 번쩍 들고 부르르 떨면서 머리를 비틀비틀 꼬다가 한 발 지척 내디디곤 했다. 애들은 이 흉내를 내며 따른다. 앞으로 막아서고 뒤로 따르면서 깡충깡충 뛰어 칠성의 얼굴까지 똥칠을 해놓는다.”(강경애, ‘지하촌’, 1936)

 소설 ‘지하촌’의 칠성이는 네 살 때 홍역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팔다리에 마비가 온 장애인이다. 가난한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매일 동냥을 다닌다.

 그가 연모하는 큰년이네도 사정은 비슷하다. 큰년이는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인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산통이 오는데도 일을 하다가 밭에서 낳은 아기는 하루 만에 죽었다. 큰년이는 가난 때문에 부잣집 소실로 팔려 가야 할 처지다.

 칠성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자신들의 처지에 절망하고 괴로워한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큰년이의 동생을 두고 가난과 병마 속에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말하는 모친을 보며 칠성은 “자신도 어려서 죽었더라면 이 모양은 되지 않을 것을”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그의 절망은 깊었다.

 그런데 거리에서 만난 걸인에게서 칠성은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된다. 그 걸인 역시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이었다. 그는 원래 공장 노동자였으나 산업재해로 다리가 꺾인 뒤 보상 한 푼 못 받고 쫓겨났다고 했다. 그는 칠성에게 애꿎은 운명 탓 말고 왜 “우리가 이 꼴이 되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소”라고 말한다. 소설은 1930년대 후반의 식민지 상황상 그 이상의 사회 비판은 하지 못하고 있다.

 공지영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도가니’가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이 사람들을 분노하게 한 일차적인 요소는 두 가지인 듯하다. 첫째, 영화를 통해 눈으로 ‘목격’함으로써 대중이 아동 성폭력의 참혹상을 실감했다는 점. 둘째, 범죄의 가해자가 권력자일 때 사회의 정의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이 영화가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는 점. 이 때문에 아동 성폭행과 관련된 법안에 대한 문제 제기나 영화의 모델이 된 학교에 대한 재처벌 등에 대해서는 공론화가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에 비하면 아이들이 ‘장애인’이어서 더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는 듯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주인공 아이들의 수화를 귀 기울여 이해하고 진심으로 믿어준다. 그래서 그들의 청각장애는 영화에서 그다지 큰 핸디캡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도 그러할까? 장애를 가진 이들의 목소리와 인권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자주 묵살되고 있는가? 부디 지금의 분노가 이 점도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