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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악마의 맷돌’이 다시 돌기 시작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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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이명박(MB) 정권은 정말 운이 없는 모양이다. 4대 강 사업이 마무리되는 올가을쯤 꾹 참았던 설움을 보란 듯이 씻으려 벼르고 있었건만 청와대 비리 사건에 그만 설욕 기회가 유실되고 말았다. 거기에, 꺼진 듯했던 금융위기가 재발 조짐을 보이고 있으니 자칫하다간 동분서주했던 치적이 다 날아가게 생겼다. 정권 초기에는 월스트리트발(發) 금융폭탄에 휘청거렸고, 지금은 유럽발 재정위기가 국내 경제를 강타하고 있는 중이다. 실물생산지수가 3년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공장은 이미 가동률을 낮췄고, 소비자는 지갑을 닫았다. 정권재창출의 최대 악재인 증시 폭락세가 내년까지 이어진다면 경제 지킴이를 자처했던 보수의 몰락은 불 보듯 뻔하다.

 그게 정권교체에 국한된 문제라면 좋으련만, 진보든 보수든 금융활화산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한국경제에 튼실한 방화벽을 만들 묘책이 없다는 것이 더 문제다. 80년 전, 인류를 엄습했던 대공황은 정치적 지혜와 국가의 개입으로 풀어냈다. 그런데, 21세기 금융공황은 인간의 대처 능력을 뛰어넘는다. 마치 잘못 건드린 핵연료봉이 스스로 제 몸을 다 태울 때까지 분열을 계속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 디폴트 사태는 독일의회의 결단으로 겨우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미봉책에 불과하고, 월스트리트는 20조 달러에 달하는 공적 자금을 꿀꺽 삼키고 여전히 탐욕의 춤을 추고 있다. 미국의 월가나 유럽에서 대형은행 하나라도 부도 사태를 맞게 된다면, 그 화염은 전 세계로 번져나갈 것이고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에 닥치는 재앙은 고스란히 가계파산으로 옮겨붙을 것이다.

 ‘악마의 맷돌’이 진정 다시 돌기 시작했는가? 산업화 혁명의 그 우렁찬 구호가 인류를 처참한 빈곤 상태로 몰아가는 광경을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비장한 심정으로 묘사한 말이다. 인간과 자연을 갈아 죽이는 악마의 힘! 지난 두 세기는 이 악마의 힘을 천사의 날개로 바꾸는 문명 과정이었다. 1998년과 2008년, 인류는 이 악마의 맷돌이 돌기 시작하는 소리에 경악했고, 급조된 수십조 달러의 공물로 겨우 진정시켰다. 지구촌 서민들이 치렀던 대가는 엄청났다. 3000만 명이 일자리에서 쫓겨났고, 5000만 명이 극빈자로 전락했다.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왜 내가 쫓겨나고 파산해야 하는가?’ 서민들의 피눈물에 세계는 두 개의 교훈을 얻었다. 실력에 부치는 정부 재정지출을 삼가라, 신용부도스와프(CDS) 같은 금융상품을 규제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실행이 어렵다. 당장 복지와 연금을 줄이면 인생이 고달파지고 인심이 흉흉해진다. 제조업 기반이 취약한 그리스·이탈리아·아일랜드가 당면한 정치현실이다. 포르투갈·스페인도 파산의 어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월가자본주의가 이런 틈새를 놓칠 리 없다. 이들 국가의 위험한 국채를 매입한 대형은행들에 보험상품을 판매하고, 다시 이를 2, 3차 파생상품으로 금융시장에 내놓는다. 신용부도스와프다. 그리스가 무너지면 연쇄 파산이 일어난다. 극동에 위치한 멀고 먼 한국이 영향권에 속한다.

 아카데미 영화상 다큐 부문 수상작인 ‘인사이드 잡’은 월가의 내부, 그 카지노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해부해 보여주었다. ‘악마의 맷돌’을 돌리는 그 탐욕의 연줄망이 난공불락의 성곽이란 점을 말이다. 한마디로 두렵다. 20조 달러의 세금을 쓰고도 월가 CEO들은 수천만 달러 성과급을 받았다. 임원들과 금융공학자들은 파생상품이 ‘쓰레기’임을 알면서도 2006년 한 해 동안 1조 달러나 팔았다. 서민들이 집을 잃었다. 월가의 CEO이자 파생상품 찬양자들이 모두 재무장관으로 발탁됐다. 래리 서머스, 헨리 폴슨, 로버트 루빈, 티머시 가이트너가 그들이다. 이들은 예외 없이 백만장자다. 2008년 골드먼 삭스는 AIG 파산을 예견한 상품을 만들어 수백억 달러를 벌었다. 동업자였던 그들끼리의 사투다. 금융개혁을 약속했던 오바마 행정부는 이들의 동료들로 둘러싸여 있다. 하버드대 총장을 지낸 래리 서머스는 오바마의 경제고문이었다. 누가 악마의 맷돌을 돌리는 세력을 막아낼 것인가?

 금융은 산업의 혈액이다. 피가 모자라면 빈혈로 쓰러지듯 금융이 살아야 공장이 돌고 기업이 번성한다. ‘월가를 점령하라!’는 미국 청년들의 함성은 금융이 ‘공공의 적’이 되었다는 절규다. 허구적 상품 개발로 재앙을 생산한 저 세계금융의 흉흉한 손길을 막아낼 신성한 의무가 한국 금융의 몫이라면, 금융은 한국경제를 지키는 국민의 군대이자 21세기 금융공황에 해결책을 제시할 문명사적 전초기지가 되어야 한다. 작금의 저축은행 사태에서 보듯 뒷골목에서나 벌어질 치졸한 모습으로는 어림도 없다. 세계 수준으로 도약한 제조업에 비해, 우리의 금융산업은 지금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는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