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일이 1973년 6월 독일 베를린영화제 기간 중 김지미·신일룡과 함께 본 성인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파리 에펠탑을 배경으로 남자 주인공 말론 브란도가 여자에게 접근하는 장면이다.
프랑스 칸, 이탈리아 베니스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독일 베를린영화제는 내 시야를 넓혀준 소중한 자리였다. 1973년 6월 신상옥 감독이 신필름이 운영하던 허리우드극장 사무실로 나를 호출했다. “베를린영화제에 가보자. 영화제 끝나고 파리에 가서 영화 하나 찍자고. 제목은 ‘이별’이다.” 유럽에 가본 적이 없던 나는 그 말에 혹했다. ‘이별’은 신 감독이 파리 로케이션을 염두에 두고 기획한 작품이다. 영화제 시작일은 73년 6월 22일.
문화공보부(이하 문공부)가 베를린에 출품한 작품은 정진우 감독의 ‘섬개구리 만세’다. 낙도 어린이들이 고생 끝에 상경해 전국농구대회에서 준우승한 실화가 바탕이 됐다. 신 감독은 나와 윤정희 주연의 ‘내시’를 희망했지만, 문공부 측은 외설 시비가 있는 ‘내시’를 한국 대표작으로 낼 수 없다면서 비경쟁 부문 옵서버 작품으로 결정했다. 김재연 영화진흥공사장을 단장으로 영화진흥공사 진흥이사인 정진우·신상옥 감독, ‘이별’의 남녀주연인 나와 김지미, ‘섬개구리 만세’의 주인공 신일룡 6명으로 한국 대표단이 꾸려졌다.
당시 서베를린은 동독 안에 있어 한국인이 육로로 왕래하는 것이 수월하지 않았다. 항공편을 이용해야 했다. 서베를린 도착 후 베를린힐튼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나는 일행과 저녁을 하기 위해 주머니에 200달러만 넣고 나갔다. 나머지 2800달러는 호텔방 가방 속에 있었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니 가방이 열려 있었고, 돈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큰돈을 잃어버린 나는 망연자실했다.
경북고 선배인 김형배 영사가 호텔 지배인에게 항의했으나 지배인은 난색을 표했다. 귀중품은 호텔 프런트에 맡겨야 했는데 그렇게 못한 내 잘못이었다. 경험 부족으로 벌어진 일이다. 김 영사는 체류 중 쓰라며 개인 돈으로 2000달러를 주었다. 나는 귀국해 여러 번 식사 때마다 돌려드리겠다고 했으나 김 영사는 끝내 사양했다. 고마운 선배다.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나선 ‘섬개구리 만세’ 기자회견이 열렸다. 외국 기자들은 영화 속 혹독한 훈련 장면이 아동학대며, 전체적으로 정부 홍보 성격이 짙다고 비판했다. 신 감독의 ‘내시’는 호평과 함께 외국 수입업자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러나 문공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아 수출은 무산됐다.
영화제 기간 중 말론 브란도 주연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노컷 버전으로 상영됐다. 김지미가 나와 신일룡 사이에 앉아 이 영화를 보았다. 자유분방한 섹스를 추구하는 성애영화지만 자본주의를 비판한 작품이었다. 격렬한 정사 후 여배우가 돌아누울 때 체모 일부가 노출되자 당황한 김지미가 고개를 확 숙였다.
윤이상
베를린 체류 이틀째, 신 감독이 재독 작곡가 윤이상을 만나러 가자고 했다. 김 영사가 우리의 방문을 도왔다. 호반 숲 속에 있던 그의 집은 동화 속 집처럼 아름다웠다.
윤이상 부인이 뜻밖에 참기름으로 버무린 고사리 무침을 내왔다. 우동 면발처럼 통통한 고사리 맛이 기막혔다. 부인은 “뒷산에 고사리 천지인데 지금이 한창 맛있을 때”라고 했다. 그 날 윤이상의 수제자인 강석희도 만났다. 신 감독과 윤이상은 소름 끼칠 정도로 신랄하게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을 비판했다. 베를린의 밤이 저물고 있었다.
정리=장상용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