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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몸집 커진 벤처… 덩치값 할까?

중앙일보

입력

처음 직원이 6명일 때는 회의시간이 따로 없었습니다. 의자만 돌려 얘기하면 그게 회의였으니까요. 요즘은 회의시간도 따로 만들어 놓고 참석하는 사람도 제한됩니다.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회사의 중요 사항을 결정하는데 자신이 참여하지 못하는 불만이 있을 수 있죠. 그걸 중간에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설명해 주면 되는데 그게 잘 안됩니다. 부장급 이상의 간부들과는 얼굴을 보며 얘기할 기회도 있고 술자리도 가끔 갖지만 평사원과는 그럴 기회가 많이 줄었어요.” 이제 직원 30명 남짓한 벤처기업 사장의 말이다.

“벤처기업이라 항상 사장과 커피 마시면서 토론하고 자기 의견을 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군요. 동료들 사이에선 우리 회사를 ‘벤처 대기업’이라고 말하기도 하죠. 물론 전에 있었던 대기업보다는 한결 낫지만 여기도 단계를 거쳐 결재를 올리고, 팀장이나 부장이 걸러낸 의견이 사장까지 못 올라가긴 마찬가지죠.” 직원 1백명이 넘는 벤처기업에 다니는 사원의 불만이다.

“언젠가 기자가 한 벤처기업에 기사와 관련된 자료를 요청했는데 답변이 무려 한 달 반 만에 돌아온 적이 있어요. 그것도 요청한 자료가 온 게 아니라 언제쯤 줄 수 있다는 답변이 그때 온거죠. 관료조직인 정부보다 더 꽉 막혔다고 하더군요.” 벤처기업 홍보대행사 직원이 전하는 해프닝 중 하나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독창적인 기술, 열린 의사소통을 기본으로 하는 벤처기업에서 언로가 막혔다는 얘기가 들린다. 직원수 1백명을 육박하거나 넘는 벤처기업의 경우 특유의 유연하고 자유분방한 토론이 잘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런 위기의식은 평사원에서부터 경영자까지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이재웅 사장은 “벤처기업의 장점은 자유로운 의사결정과 유연한 조직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도 1백명이 넘어서면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아직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영학에 나오는 조직론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다룰 수 있는 최대 인원은 15명 정도라고 한다. 때문에 회사내에 있는 팀이나 부서의 경우 10명 정도로 구성된다.

군대에서 분대 편재가 10명 내외로 이루어진 것도 그 이상이 되면 한 사람이 통제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처음에 10명 내외로 시작한 벤처들이 직원수가 늘어나면서 관료화되고 딱딱해졌다고 한다. 벤처 자신들이 그처럼 경계하는 이른바 대기업병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오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 벤처기업의 몸집이 커진 이유는 무얼까. 급속한 성장 탓일까. 작년 한 해 정보통신기술(ITC)
산업의 경제성장 기여율이 16%에 이를 정도로 ITC기업을 필두로 한 벤처기업의 성장세는 빨랐다.

4월 말 현재 국내 벤처기업이 7천개를 넘어 미국(8만여개)
, 영국(1만5천여개)
에 이어 세계 3위의 벤처대국으로 성장했다. 또 벤처기업에 고용된 인원만도 20여만명에 이른다. 이처럼 벤처기업과 관련된 생태계가 확장되면서 처음에 5명 내외로 시작했던 벤처기업이 불과 1∼2년 만에 1백명에 육박하는 경우도 많다.

시장이 커지면 자연 몸집도 커지게 마련이다. 인터넷 인구가 1천만명이 넘어서고, 이에 따른 전자상거래 시장의 확대(96년 1백54억원에서 2000년 1조8천억원)
도 급격하다.

외국, 특히 미국의 경우 아웃소싱이나 스핀오프(spin-off)
를 통해 몸집을 줄여 나가는 것과는 달리 우리 나라의 경우 기업환경이나 문화가 내부에서 그냥 해결하려는 경향도 문제다. 또 일정 정도 시장성을 인정받은 기술이나 아이디어의 경우 인수합병(M&A)
을 통해 대기업형 벤처와 아이디어 벤처가 분리되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 M&A시장이 활발하지 못해 벤처기업의 몸집이 커지는 실정이다.

노동시장이 더 말랑말랑해져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윤준수 지식경영연구소장은 “만약 우리 나라의 노동시장이 더 유연하고, 인재풀이 다양하다면 기업들이 굳이 높은 고정비용을 들여가며 인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경우 파트타임, 계약제 고용 등 노동시장이 유연하다. 또 벤처인재에 핵심이 되는 25∼34세의 평균 직업 보유기간도 2년 8개월(98년 기준)
로 나타났다. 통계가 없어 비교하긴 어렵지만 우리 나라에 비해 상당히 짧은 것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벤처자금이 일시에 과다하게 유입된 것도 한 원인이다. 지난해 코스닥시장으로 유입된 돈은 4조8천억원, 벤처캐피털을 통해 유입된 자금은 7천6백93억원으로 이는 95년부터 97년까지 3년간 유입된 자금보다 많은 양이다. 더구나 벤처기업이 몰려 있는 코스닥시장의 주가총액은 99년 말을 기준으로 1백6조원을 넘어 섰다.

이러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벤처기업들은 고액연봉, 스톡옵션 등으로 많은 인력을 유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일부 기업들은 다른 기업에 출자하는 등 문어발식 확장도 하고 있다. 코스닥 공시자료에 의하면 골드뱅크커뮤니케이션즈의 경우 32개사에 5백80억원을 투자하고 있고 다음커뮤니케이션과 디지틀 조선일보는 각각 4백억원 이상을 8개사 이상에 투자했다.

이외에도 한글과컴퓨터, 인터파크, 메디다스, 인성정보, 세원텔레콤, 테라 등이 적게는 수십억원에서 많게는 3백억원에 이르는 돈을 다른 기업에 투자했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여러 곳에 분산 투자하는 것은 경영의 측면에서는 타당하지만 세계적 경쟁력을 못갖춘 한국 벤처기업으로서는 자신의 고유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럼 미국의 벤처기업은 우리보다 더 날씬한가. 아니다. 일반인들도 알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 벤처기업들은 우리 나라 벤처기업보다 직원이 훨씬 많다. 그러나 단순 숫자 비교를 넘어서면 상대적으로 우리 벤처기업이 훨씬 더 몸집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와 미국의 대표적 벤처기업 5개사의 1인당 평균 매출액을 비교한 결과 미국이 한국보다 3배 가까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한국의 생산성 수준이 미국의 절반(97년 기준)
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낮은 것이다. 일부지만 한국의 벤처기업이 인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문제에 대해 우리 나라의 벤처 경영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앞서 이재웅 사장처럼 몸집이 커진 벤처기업의 사장들은 대부분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한글과컴퓨터의 전하진 사장은 의사소통 부재에 대해 “내부 인트라넷을 통해 정보를 가능한 한 공개하고, 비실명 게시판에서 직원들의 의사를 듣는 형태로 보완해 나가고 있다”면서 “그렇다고 지금 와서 다시 10명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어떤 형태로 의사결정 과정을 만들어 가느냐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즉 벤처기업이 덩치가 커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 연구소의 이경봉 부사장은 “부서장급으로 권한을 대폭 이양하는 방법을 통해 조직의 동맥경화를 막으려 한다”면서 “이미 안연구소내의 인터넷 사업부문을 사내벤처로 내보내는 등 조직 비대화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벤처기업 규모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벤처기업은 최고 경영자의 명성에 의해 회사의 신뢰가 좌우되는 스타십 비즈니스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최고 경영자와의 의사소통 단절은 바로 기업의 경쟁력 약화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윤소장은 “벤처기업 속성상 규모가 커지면 일반회사보다 더 1인 집중화가 심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최고 경영자는 자신의 사업계획이나 비전을 직원들과 수시로 공유하고 명확하게 권한을 분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기술력이나 마케팅 능력만으로 볼 때 벤처기업은 대기업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 신속한 의사결정과 유연한 업종전환, 새로운 영역으로 도전은 그 자체로 벤처의 경쟁력이다. 덩치가 커지면 보수적으로 기업을 운영할 수밖에 없고 그때부터 벤처는 경쟁력을 잃어버리기 쉽다. 이런 면에서 일본 미즈미사의 다쿠치히로시 사장의 말은 새겨볼 만하다.

“팀은 무턱대고 크게 짜면 안 된다. 조직이 커지면 분할하라고 지시한다. 커지게 되면 팀이 아니라 조직이 되기 때문이다. 조직이 많아지면 계급이 생긴다. 그러면 커뮤니케이션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팀의 리더가 통솔할 수 있는 범위는 많아야 20명이다. 가능하면 인원은 적을수록 좋다.”

이코노미스트=이석호 기자 <luk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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