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면신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7면

갓의 먼지를 턴다는 탄관(彈冠)이라는 말이 있다. 『한서(漢書)』 ‘왕길(王吉)열전’의 ‘왕길이 벼슬에 있으니 공우(貢禹)가 덩달아 갓의 먼지를 털었다〔王陽在位 貢公彈冠〕’라는 대목에서 나온 말이다. 친구가 불러줄 것을 기대하며 미리 갓의 먼지를 턴다는 뜻이다.

 중국 남북조시대 송나라의 역사서인 『송서(宋書)』를 편찬한 심약(沈約:441~513)이 쓴 ‘제 고안륙소왕 비문(齊故安陸昭王碑文)’에 ‘탄관출사(彈冠出仕)’라는 말이 나온다. 갓의 먼지를 털고 벼슬길에 나선다는 뜻이다. 조선 중기의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명종 13년(1558)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는데 퇴계 이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탄관진몌(彈冠振袂)’라고 썼다. 갓의 먼지와 소매를 털고 벼슬길에 나섰다는 뜻이다.

 과거에 급제하면 광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잡히며 어른들을 찾아보는 유가(遊街)를 하는데 이때가 본격적 정계 진출 이전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다. 이후 혹독한 신고식인 면신례(免新禮)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대승은 이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1차 때는 병 때문에 승문원 면신례를 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조선 후기의 백호 윤휴(尹鑴)는 ‘의상소(擬上疏)’에서 면신례에 대해 ‘갓을 찢고 매질을 하고 못 하는 짓이 없다’고 비판했다. 윤휴는 ‘아이에게 답하다〔答兒〕’라는 편지에서 “면신은 귀신 복장에 온갖 잡희(雜戱)를 하는 것인데, 이는 사대부의 염치에 관계된 일이니 절대 해서는 안 된다”면서 벼슬을 못 하더라도 하지 말라고 권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남구만(南九萬)은 ‘면신벌례를 금할 것을 청한 계사(請禁免新罰禮啓)’에서 ‘신임 관원에게 술과 고기를 갖고 오라고 요구해 배불리 먹는다’면서 ‘심지어 은자(銀子)와 포(布)를 바쳐 술과 고기 대접하는 일을 대신하는 자도 있다’며 금지를 요청했다. 조선 초의 성현(成俔)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자허면신(自許免新)’한 박이창(朴以昌)의 사례를 전하고 있다. 한림원(翰林院)은 처음 들어오는 신래(新來)에게 만 50일 동안 길들인 다음 자리에 앉는 면신(免新)을 허락했는데, 박이창에게는 그 기간이 지나도 허락하지 않자 스스로 자리에 앉았다. 이것이 스스로 면신했다는 자허면신(自許免新)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에 나선다는 것은 꽃가마 타는 유가(遊街)가 끝나고 혹독한 면신례가 시작된다는 뜻이다. 면신례를 이겨내도 업적을 남기긴 더욱 힘든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