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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보석조건부 영장 제도’ 공론화해 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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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형사사건에서 피의자 구속은 수사 목적상 신병(身柄) 확보의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신체를 구금함으로써 법원 판결 전에 이뤄지는 형벌 효과를 노린 경우가 많다. 뇌물 등 사회적 지탄을 받은 사건에서 구속은 응징이라는 대리만족을 국민에게 주는 것도 사실이다. 검찰권 남용이라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현행 구속제도가 유지되는 바탕에는 이런 정서가 깔려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보석(保釋)조건부 영장 제도’를 언급했다. 그는 27일 기자간담회에서 “구속을 시키면서 보석조건을 함께 정하면 수사효율과 피의자 자유권을 동시에 살리는 양면의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양 대법원장의 취임 일성에 구속영장 제도의 변화 필요성을 담았다는 점이 관심을 끈다. 보석조건부 영장 제도는 미국·영국·프랑스·독일에서 시행 중이다. 미국에서 성폭행 혐의로 체포됐던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보석금 600만 달러를 내고 전자발찌를 끼는 조건으로 풀려나 가택연금을 받은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구속 수감은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고 자기 방어권도 제한한다. 우리 형사소송법이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규정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국민 법감정이라는 한국적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을 순 없다. 양 대법원장도 “사회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죄를 저지른 사람을 불구속 처분하는 걸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가진 자에게 유리한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제도’로 변질될 우려도 있다. 큰 죄를 저질러놓고도 돈 내면 풀려나 거리를 활보한다면 힘없는 자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줄 것이다.

 제도는 운영의 묘(妙)에 달렸다. 공무상 횡령, 뇌물수수, 정치자금법 위반, 성폭행 등 국민 공분을 일으키는 범죄는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 석방 조건을 아주 촘촘히 짠다면 불필요한 구속 남발에 따른 가정 파탄, 생계 위협 등 선의의 피해를 줄일 수도 있다. 다만 법원과 검찰이 밥그릇 싸움 차원에서 접근하면 곤란하다. 구속제도는 국민 생활과 밀접하다. 국민이 원하는 제도가 무엇인지 공론화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