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성필에게 흙은 물감, 풀은 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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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m 가까운 캔버스는 스스로 공간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청보리밭, 큰비 내린 강가일 수도 있다. 그것은 자연이 만든 풍경화고, 우주다. 다 캔버스에 바른 흙 때문이다.

 재불(在佛)화가 채성필(39) 흙그림전 ‘바람의 땅’이 경기 광주 영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바람의 땅’ ‘익명의 땅’ ‘대지의 몽상’ 등 아득한 제목의 대형 회화 연작 13점이 전시장을 압도한다. “흙은 본질, 태초입니다. 모국을 떠난 입장에서 흙은 향수이고, 어릴 적 흙놀이 추억이기도 합니다. 흙과 멀어진 도회의 삶 속에서 우린 흙에 더욱 집착하게 되죠.”

 그는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조선 말 소치(小癡) 허련(1808∼93)부터 남농(南農) 허건(1908∼87), 의재(毅齋) 허백련(1891∼1977) 등으로 이어지는 호남화단의 산실 운림산방(雲林山房)이 여기 있다. 그 또한 어려서부터 조부에게 서예·문인화를 배웠다. 중학교 3학년 때 상경했다. ‘야산서 흙장난하고 놀던 촌놈’ 취급을 받던 울고 싶은 사춘기였다. 그리고 법대에 진학했다 6개월 만에 작파하고 서울대 동양화과에 진학했다. 화선지에 먹을 쓰기보다 흙을 이용한 그림을 더 많이 그렸다. 대학원까지 마치고 프랑스로 유학 갔다. 좁은 집 부엌에서 그림을 그렸다.

 어느 날 아내가 음식을 쏟았다. 그는 국물이 튈까 얼른 캔버스를 세웠다. 국물이 흘러내린 자국 그대로 강이 되고 그림이 됐다. 흙그림은 이렇게 탄생했다. “개울만 건너도 흙은 달라진다고 합니다. 빛깔과 점성, 입자의 굵기, 냄새와 촉감도 다양합니다.”

 그는 전북 고창의 황톳빛 흙, 남프랑스 시골의 녹색빛 도는 흙 등 현지 여행 때마다 흙을 채취한다. 붓 또한 흙에서 자란 풀이다. 띠풀·수수비 등 풀을 묶어 직접 만든다. 바닥에 뉘어 놓은 캔버스에 은분을 여러 겹 깔고, 천연안료와 흙물을 뿌리고, 마르기 전 캔버스를 세워 자연스럽게 흐르게 한다. “경계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제가 걷는 길이 그 경계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동양화 전공자가 서양서 사는 것 등. 허나 흙은 경계가 없습니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소재입니다.”

 흙의 중요성을 말하는 예술가는 적지 않다. 전시장에 흙을 직접 끌어다 놓는 미술가들도 있다. 그러나 흙을 재료로 독창적 표현 방식을 창출한 화가는 많지 않다. 그래서일까. 지난 전시에선 배용준이 그의 작품을 여러 점 샀다고 한다. 다음 달 2일까지, 입장료 성인 4000원. 031-761-0137.

광주(경기)=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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