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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수 전문기자의 경제 산책] 훼손된 건전재정 유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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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김정수
경제전문기자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잘하면 그리스 불에 데지 않고 넘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허망한 바람은 갖지 않았으면 한다. 이번에 그리스가 국가부도를 맞이하건 피하건, 글로벌 경제가 그리스 부도에 버금가는 피해를 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유 있는 유럽 강국들이 그리스를 돕지 않는다면, 그날로 그리스는 국가부도 사태를 맞게 된다. 그 순간 유럽과 미국이 금융위기에 빠지고 동시에 글로벌 경제가 침체에 빠지게 된다. 반대로 유로지역이 나서서 그리스를 돕는다고 치자. 그래서 그리스가 부도를 면한다고 하자. 그래도 나아질 건 없다. 오늘 일이 몇 달 뒤로 미뤄질 뿐 더 많은 빚을 진 그리스가 더 큰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그리스를 ‘질서 있게 부도처리’해 본들, 중간 과정만 약간 달라질 뿐 결말은 같다. 이래 치든 저래 치든 글로벌 경기침체는 피할 수 없다.

 오늘 사태는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 금융위기 전에 이미 쌓일 대로 쌓인 가계부채와 ‘큰 정부’ 부채는, 위기 이후에 (개인 빚은 불경기 때문에, 정부 빚은 위기와 불경기에 대처하느라) 더 늘어났다. 누가 보더라도 그 빚은 언젠가는, 가급적 빨리 털어내야 하는 것이었다.

 많은 전문가가 글로벌 부채감축(global deleveraging)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을 해왔다. 글로벌 불경기가 잦아들 즈음부터 ‘당장 나라 빚 늘리기를 멈추고, 지금부터라도 줄여야 한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곤 했다. 그때마다 ‘큰 정부’ 신봉자들은 ‘아직은 경기부양의 고삐를 늦출 때가 아니다, 오늘의 긴축은 내일의 불경기와 재정적자를 불러온다’며 나라 빚 추임새를 멈추지 않았다. 빚 잔치가 하루하루 미뤄지는 사이에 나라 빚은 더욱 늘어났다.

 그 빚 잔치의 날이 지금 도래한 것이다. 정부가 아닌 시장에 의해. ‘정부가 저렇게 애를 쓰는데 조만간 경제와 재정이 나아지지 않을까’ 하고 기다려 주던 시장이 더 이상 믿고 기다리지 못하겠다며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리스 정부의 대응능력이나 주요 20개국(G20) 등의 집단 의지에 더 이상 기대할 바가 없다고 판단이 선 것이다. (장담하건대 지금의 불이 꺼졌다고 판단이 서는 날, ‘큰 정부’ 논자들이 오늘의 사태를 들먹이며 ‘무자비한 시장’을 거론하면서 시장을 옥죄여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스처럼 한 해 국민 전체가 벌어들이는 소득의 반을 정부가 쓴다면,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대강 짐작이 간다. 정부·민간 구분 없이, 정부·국회 공히, 여당·야당 할 것 없이 모두가 정부에 기대어 살아왔을 것이다. 나라 안 세금으로 모자라면 나라 밖에서 꿔서라도 하루하루를 즐기는 삶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남유럽의 그 ‘즐기는 삶’을 북유럽은 무절제로 인식한다. 그리스 지원에 독일이 선뜻 나서지 않는 데는 이 편견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그런 그리스와 닮아가고 있다. 어쩔 수 없는 긴축에 맞서 거리로 뛰쳐나오는 근로자들에게서, 갑작스러운 증세에 ‘그런 세금 못 내겠다, 배째라’하며 소리치는 시민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본다. 우리 안에도 ‘큰 정부’ 성향이 잠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재정 상황은 다른 나라에 비해 아주 좋다. 그 큰 정부 성향이 억제되어서다. 수십 년 발동해 온 건전재정의 유전자 때문이다. 물불 가리지 않은 성장지향으로 국민의 복지 요구, 정부 의존 욕구를 억누를 수 있었기에, 그 결과물인 성장이 조세수입을 늘려왔기에 건전재정이 가능했다.

 그 유전자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다. 아니, 불건전 유전자로 돌연변이가 일어나고 있다. 효율과 절약을 기본으로 삼아왔던 정부는 어느새 비효율과 방만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자립자조를 신조로 삼아온 민간도 정부 의존을 당연한 권리 행사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런 이들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의 복지 주장은 당연한 생존본능의 발로다. 지금 우리는 너도 나도 ‘제 2의 그리스’가 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그리스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이다. ‘저렇게 하면 나라가 망할 수 있구나’를 깨닫게 해 주는 사례다. 그 깨우침을 취하느냐 마느냐는 우리 선택이다.

김정수 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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