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폭주 vs 만취 손님 … 택시 사고 미스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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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역주행 사고 추돌 사고를 일으킨 택시가 가로등에 부딪혀 파손되었다. [사진 경찰청 제공]

추석 연휴가 시작되던 지난해 9월 21일 새벽 3시30분. 서울 동대문구 장안평역 인근에서 택시 한 대가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란불로 신호가 바뀌고 얼마 뒤, 택시가 갑자기 인도 쪽으로 돌진해 지나가던 여성 이모(28)씨를 들이받았다. 이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외상성 뇌출혈로 사망했다.

 처음엔 택시에 탔던 회사원 정모(41)씨가 사고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됐다. 택시 운전자 김모(70)씨가 경찰 조사를 받으며 “조수석에 앉은 손님 정씨에게 안전벨트를 매라고 했더니 멱살을 잡고 마구 때렸다”며 “폭행을 피하려고 머리를 숙이는 바람에 사고를 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었다. 정씨는 “술에 취해 잠을 자고 있었을 뿐 때리지 않았다”고 호소했지만 결국 운전자 폭행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법정에 서게 된 정씨는 지난 2월 1심 재판에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 받았다. 사고 직후 달려 나온 운전자 김씨가 “112에 신고해달라”고 소리쳤다는 목격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법원이 김씨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 조경란)는 지난 22일 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우선 재판이 진행될수록 사고에 대한 김씨의 증언이 달라진 점을 주목했다. 또 오른쪽 눈 부위가 붓고 피가 날 정도로 다친 김씨와는 달리 손님인 정씨가 전혀 다치지 않은 점도 이상하게 여겼다. 재판부는 “사고 당시 속력은 시속 52㎞로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면 상당한 상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라며 김씨 주장을 일축했다.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사고 직전의 또 다른 교통사고도 영향을 미쳤다. 김씨가 신호가 바뀐 뒤 속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옆 차로 택시를 스치는 사고가 났지만 속력을 줄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김씨가 이 사고로 벌금 200만원을 선고 받고도 정식재판을 청구하지 않은 점도 무죄 선고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이씨 사망 사고의 원인 제공자는 누굴까. 서울고법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정씨가 사고를 유발했다는 점에 대한 입증이 충분하지 않았음을 지적한 것”이라며 “사망 교통사고의 가해자가 누구인지 가린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김현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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