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플 공포, 서민 덮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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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 침체 공포감에 주가와 환율이 요동쳤다. 23일 서울 명동 외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한 직원이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다. 이날 코스피는 1700선이 무너졌다. [김도훈 기자]


23일 오후 4시 서울 역삼동 개나리 주유소는 한산했다. 주유기 6대에 한 번에 20대의 차에 주유가 가능한 큰 규모(약 1818㎡)지만, 한번에 주유하는 차는 많아 봤자 3대 정도였다. 이날 이 주유소 박정훈(41) 사장의 한숨도 어느 때보다 깊었다.

 “평상시라면 주유하러 드나드는 차로 주변 도로에 차량 정체가 생길 정도인데 손님이 이 정도로 줄어들 줄은….” 이곳에서는 한 달에 1만 드럼(한 드럼당 200L) 이상의 기름을 판다. 보통 주유소 판매량의 다섯 배다. 하지만 최근 치솟는 기름값 탓에 판매량이 9000드럼 정도로 줄었다. 싼 기름값 덕에 개나리 주유소는 강남 일대 ‘기름값 지킴이’로 통했다. 마진을 줄이되, 많이 파는 박리다매 전략이었다.

 이날 개나리 주유소의 가격판에 적힌 기름값은 L당 1989원(보통 휘발유). 서울지역 평균(2029.39원)보다 40원가량 싸다. 강남의 주유소 중 기름값이 L당 2263원인 곳도 있으니 지역 시세와 비교하면 200원 이상 싼 셈이다. 박 사장은 그러나“고객과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기름값 2000원 선을 지키려고 3주 전부터 버텼는데 힘들 것 같다”고 고개를 저었다.

 다음 주부터 기름 공급가를 또 L당 37원 올린다는 정유사의 통보를 오늘 받아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국제유가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지만 치솟는 환율 탓이다. 정유사는 오르는 주간 환율 상승분을 계산해 기름값에 반영하고 있다.

 이날 주유소를 찾은 김애경(46·서울 도곡동)씨는 “요즘엔 기름값이 너무 올라 웬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차를 몰고 나서질 않는다”고 했다. 또 다른 주유 손님인 이환민(68)씨는 “기름값이 더 오른다면 자가용을 안 타고 다닐 생각”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치솟는 기름값뿐 아니다. 주가·환율도 연일 요동치면서 트리플(triple·3중) 공포가 서민들을 짓누르고 있다. 이날 코스피는 전날보다 103.11포인트(5.73%) 급락한 1697.44로 장을 마감했다. 연중 최저치다. 코스피가 1700선 아래에서 장을 마친 것은 지난해 7월 8일 이후 1년2개월여 만이다. 코스피는 이틀 새 156포인트나 하락했다.

외환시장도 온종일 롤러코스트를 탔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가치는 달러당 13.8원 오른 1166.0원에 장을 마감했다. 장중 한때 1196.0원까지 떨어졌던 원화 값은 정부의 구두 개입과 물량 개입으로 닷새 만에 올랐다.

전 세계 경제가 폭풍 속으로 내몰리는 이른바 ‘R(Reccession·경기침체)의 공포’ 탓이다.

 하지만 공포의 강도는 한층 크다. 2008년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촉발한 대혼란의 상흔이 여전히 생생한 탓이다. 게다가 이번엔 선진국·개도국 할 것 없이 침체의 먹구름이 더 짙고, 더 넓게 깔리고 있다.

 실제로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22일 “세계경제가 위험국면에 진입했다”는 경고 메시지를 날렸다. 가늠키 어려운 세계 경제의 위기 상황과 금융시장의 격랑 앞에 서민은 속이 탄다.

 자산을 불려보겠다며 넣어둔 주식·펀드가 하루가 다르게 쪼그라들고, 유학 자녀의 학비·생활비 대기가 날로 버거워져서다.

 서울 목동에 사는 주부 박지향(37)씨는 요즘 밤잠을 설친다. 지난 8월 주식에 투자한 돈 4000만원의 수익률이 최근 주가 급락으로 끝 모르게 추락하고 있어서다.

 그는 올 초 저축은행에 돈을 맡겼다가 부실 소식에 깜짝 놀라 돈을 빼 주식에 투자했다.

 박씨는 “이 돈은 내년 2월 전세 재계약 때 전세금을 올려줘야 할 돈이라 손해를 보면 안 되는데 걱정이 태산”이라며 울상을 지었다.

 다른 투자자들 역시 이날 포털사이트 증권 게시판을 탄식과 한탄, 절망, 공포 등을 담은 글로 도배했다. 이런 글도 눈에 띄었다. “이런 날 정전돼서 휴장되면 전력업체는 칭찬받을 텐데….”

 딸이 미국 대학에 다니는 직장인 임모(49)씨는 23일 “아침에 달러당 1195원이란 숫자를 보고 아찔했다”고 말했다. 2009년 초 원화가치가 1500원대로 떨어졌을 때 미국 고교 학비를 대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해서다. 임씨는 “이렇게 환율이 오를 땐(원화가치 하락) 카드 결제도 못한다”며 “딸에게 전화해 당분간 생활비는 방학 때 집에서 가져간 용돈을 절약해서 쓰라고 했다”고 말했다.

글=김창규·한애란·한은화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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