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 일본시장을 다시 보자

중앙일보

입력

일본삼성이 최근 조그만 '사고'하나를 쳤다.

10만엔이 넘는 고가의 멀티 액정모니터를 인터넷을 통해 팔기 시작했는데, 시작 한달 사이에 6백50대를 판 것이다.

이 정도라면 1년 매출 1만대는 문제없을 것이라며 희색이다. 싸구려로 낙인찍힌 '메이드 인 코리아' 로선 엄두도 못냈던 일이다.

일본의 관련기업이나 언론 사이에선 "아쭈, 한국 기업이 감히 일본 시장에 들어와 그런 비싼 값에 팔다니…" 하는 식의 반응이 당장 나온다.

제품도 제품이지만 인터넷을 통한 판매방식 또한 관심거리다. 일본 기업이라고 인터넷판매방식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외면해왔다.

그 걸 하려면 기존의 유통망과 질서를 다쳐야 하기 때문에 망설여왔던 터다. 이 틈에 삼성이 잽싸게 비집고 들어가 선수를 쳤다. 가벼운 잽이지만 기분좋게 한방 먹인 셈이다.

만약 일본의 기존 유통망에 맡겼다고 치자. 진열대 어느 구석에 처박혔을지 모를 일이다. 유통시장의 장벽을 인터넷으로 훌쩍 뛰어넘어버렸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꼭 인터넷만으로 일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단일상품으로 일본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진로소주는 최근 한술 더 뜨고 있다. 기존의 대리점 중심 유통망을 최근 직판제 중심으로 바꿔버렸다.

'소주 하면 진로' 랄 정도의 막강한 브랜드 파워가 구축됐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서울의 부실과는 달리 알토란 기업으로 성장해가고 있다.

이처럼 '일본 시장' 이라면 주눅부터 들던 한국 기업들이 최근 들어 여기저기에서 조금씩 고개를 쳐들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국 기업이 잘 해서도 있지만, 일본의 기존 유통시장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덕분이기도 하다. 끼리끼리 해먹는 유통구조가 드디어 깨져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왜일까.

미국 개방압력에 못배겨 변하고 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한국 정부의 역조개선 요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일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변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몰리니까 그제야 변화의 몸짓을 시작하고 있을 뿐이다.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고물가(高物價) 탓이다. 부자나라치고 주변국가들과 물가차이가 일본처럼 심한 경우는 없다.

미국은 물가가 싼 것으로 주변나라들과 비슷하고, 유럽은 너나할 것 없이 비싼 물가들이기에 통합이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의 경우 줄잡아 한국의 3~4배, 인도네시아 같은 동남아에 비하면 10배에 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법은 두가지. 일본 사람들이 싼 물가를 찾아 밖에 나가거나, 아니면 국내물가를 내리는 방법밖에 없다.

고물가의 원흉은 바로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유통조직임을 자신들도 잘 알고 있다. 유통의 담합이 국제수지흑자에 효자노릇을 했을진 몰라도 다른 한편으로 고물가를 자초했으니 말이다.

일본 스스로 지난 버블 이후를 일컬어 '잃어버린 10년' 이라지만 일본 특유의 엄살과 오만이 뒤섞여 있는 표현이다.

잃어버리기는커녕 정상을 되찾아가는 10년이었다는 편이 옳다. 미쳤던 땅값이 이성을 뒤찾았는가 하면, 편의점 체인을 중심으로 유통구조도 엄청 달라져왔다.

최근 들어서는 '1백엔 숍' 이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하고 있다. 하나같이 물가를 내리는 변화들이다.

그럼에도 일본의 물가는 여전히 터무니없다. 유통혁신 본격화는 이제부터라는 뜻이기도 하다. 더구나 인터넷까지 끼어들면서 기존질서의 붕괴현상은 가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찬스다. 무슨 꾀를 내서라도 일본 시장에 이 참에 제대로 끼어들어야 한다.

유통장벽 어쩌구 하는 상투적 핑계는 그만 접고, 일본 시장을 본격적으로 다시 봐야 할 시점이다. 지척에 있는 부자나라 황금시장이 스스로 변화의 용틀임을 시작하는 마당에 해묵은 일본 콤플렉스에 젖어 멍하니 쳐다만 볼 것인가.

어쨌거나 물가가 3배 이상 비싼 나라에 진출해 돈벌이를 못한다면 무슨 이유를 대든 간에 문제는 우리쪽에 있는 것이다.

이제와서까지 그럴 능력도 없다면 공연히 흰소리만 할 게 아니라 아예 하청기업을 자임하고 일본에 무릎을 꿇든가. 절호의 기회가 오고 있으니, 대응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 몫이다.

이장규 <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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