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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되는 연습 더 해야 할 유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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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호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지난 14일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다롄(大連)에서 한 세계경제포럼(WEF) 개막 연설엔 유난히 눈에 띄는 표현이 있었다. 영문 원고에 담긴 ‘put their own houses in order’가 그것이다. 국내 언론엔 ‘유럽의 재정위기 국가들은 먼저 내부 문제부터 처리하라’는 뜻으로 소개됐다. 하지만 이 말은 직역할 때 진의가 더 잘 드러난다. ‘집구석 정리나 잘하라’는 핀잔 아니겠나.

 유럽의 책임론을 아프게 지적한 말이다. 그가 이처럼 유럽에 한 방을 날릴 수 있는 건 역시 돈의 힘이다. 재정난에 허덕이는 유럽 국가들은 차이나 머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중국은 이미 지난해 스페인 국채를 사들였다. 또 디폴트 위기에 빠진 그리스 국채 매입을 늘리겠다고 했고, 이어 이탈리아 국채 매입도 검토 중이라 한다. 유럽 재정위기의 소방수 역할을 자임한 셈이다.

 유럽은 급한 김에 여기저기 손 벌리기 바쁘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신흥국들이 유럽 국가들의 국채 매입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정위기를 계기로 돈 문제에 관한 한 유럽은 완전히 을(乙) 신세가 돼 버렸다.

 하지만 처음 겪는 일이어서인지 을의 자세가 잘 안 나온다. 차관이나 다름없는 국채 매입은 반기면서도, 자기 나라에 들어와 땅 사고 기업 인수하는 데엔 경계하고 있다. 중국, 중국 자본에 대한 유럽의 이중적 태도다. 최근 중국 기업의 아이슬란드 토지 매입을 둘러싼 논란이 대표적이다. 부동산 거부 황누보(黃怒波) 종쿤그룹 회장이 아이슬란드 국토 면적의 0.3%에 이르는 땅을 사들이려 하자, 유럽에선 즉각 경계론이 제기됐다. 황 회장은 투자 목적을 관광단지 건설이라 밝혔다. 하지만 파이낸셜 타임스를 비롯한 유럽 언론들은 북대서양 지역에 대한 중국의 지정학적 진출 전략이라는 시각을 거두지 않고 있다. 이들은 또 황 회장이 중국 공산당과 정부기관에서 일했던 경력을 지적함으로써 중국 정부의 입김을 은연중에 시사하기도 했다. 지난해 중국이 아이슬란드를 돕기 위해 맺은 5억 달러 규모의 통화 스와프도 그 같은 전략적 맥락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거의 황화론(黃禍論) 수준이다.

 약 300㎢에 이르는 토지 거래는 아이슬란드 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다. 정부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데, 주무부처인 내부무는 다소 부정적이라고 외신은 전한다. 황 회장은 땅값으로 880만 달러, 관광단지 건설엔 그 10~20배의 돈을 쏟아부을 계획이라 한다. 이 정도 돈이면 형편이 어려운 아이슬란드로선 충분히 혹할 만하다. 그런데도 승인하느냐, 마느냐 하며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을 보면 중국에 대한 유럽의 시선이 아주 호의적이진 않음을 알 수 있다. ‘돈 좀 빌려달라. 그러나 우리와 같이 놀 생각은 하지 마라’고 하는 거나 같다. 급한 쪽이 아직도 뻗대는 모습이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원 총리는 중국을 시장경제(market economy)로 인정해줄 것을 유럽에 요구했다. 돈 낸 만큼 노는 물에 같이 끼워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을(乙)이 된 유럽은 아직도 과거의 거울로 중국을 바라보는 듯하다. 중국은 갑(甲) 행세를 해보려고 벼르고 있는데 말이다. 양쪽 다 겉으론 파트너십을 강조하지만, 속내는 서로 다르다. 중국 기업의 투자엔 중국의 국가의지가 담겼다는 유럽의 의구심, 돈 낸 만큼 대우를 받아야겠다는 중국의 자존심, 그 사이엔 상당한 온도차가 느껴진다. 누구 잘못이 큰지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국제공조가 시급한 시점에서 이런 거리감은 세계경제에 좋을 리 없다. 양측이 서로에게 적응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듯하다. 그동안 재정위기의 불이 더 번지지 않기만 빌 뿐이다. 유럽은 을이 되는 연습을 더 하고, 중국은 제대로 갑 노릇을 하려면 을 시절의 때를 벗길 바란다.

남윤호 중앙SUNDAY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