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부터 실시되는 고교 ‘융합형 과학’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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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년부터 고등학교에 융합형 과학교육이 도입된다. 기존의 과학 교육은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으로 엄격하게 구분해 개념을 설명해주는 식이었다. 융합형 과학은 ‘우주와 생명’ ‘과학과 문명’ 과 같은 주제로 과학의 각분야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엮여있는지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풀어낸다. 경기 오남고 김영준(과학) 교사는 “융합형 과학은 현대 과학과 기술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토대로 과학이라는 커다란 숲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융합형 교육을 위해 교과서부터 바뀌었다. 올 3월부터 일선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고1학년용 융합형 과학 교과서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개념과 과목이 넘나드는 형태다. 일례로 ‘행성의 대기’를 설명하는 단원에서는 우주의 빅뱅(지구과학)과 위치에너지·운동에너지(물리)·이산화 탄소의 구조(화학) 등이 동시에 제시된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소재도 다양하다. 정보통신과 신소재, 에너지와 환경처럼 실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첨단 과학 관련 이슈도 다루고 있다.

 실험도 늘었다. 기존의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에 공학과 기술에 대한 이해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영상의 표현’이라는 단원을 배우면서 LED로 빛의 3원색을 표현하는 실험을 해보고 이를 통해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를 통해 표현되는 빛의 원리를 알게하는 식이다.
 
융합형 교육에 호불호 엇갈려

 새로운 교과서에 대해 학생들은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이다. TV나 신문에서 과학 관련 뉴스가 나오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김 교사는 “예년에는 1학년 학생들이 ‘빅뱅’이나 ‘초신성’ 같은 단어의 의미조차 몰랐다”며 “융합형 교과서로 수업한 뒤부터 과학 시간에 배운 용어를 일상생활에도 사용하는 게 종종 눈에 띈다”고 말했다. 학생들에게 익숙한 현상을 주제로 주고 관련된 과학적 배경 지식을 알려주다보니 일반 상식처럼 쉽게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융합 교육이 떠오르면서 파격적인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 서울 마포고와 하나고에서는 ‘수원화성’을 주제로 문과와 이과 학생들이 융합 연구를 시행하기도 했다. 마포고 김평원교사와 하나고 이효근 교사의 지도로 90명의 학생들이 9개월간 수원화성과 거중기도 직접 복원해냈다. 이 교사는 “문·이과 학생들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함께 연구하다보니 서로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영감을 주고받아 결과물의 완성도가 한층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반면, 개별 과학 과목만 출제하는 수학능력시험과 연계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수능의 과학탐구영역은 학생이 선택한 2~3과목만 시험을 치르면 되기 때문에 고1 때 융합형 과학 교과서를 배우는 게 학생들에게 시간 낭비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김영준 교사는 “융합형 과학 교육은 사회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고 반드시 알아야 할 과학적 소양을 길러주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입시에도 융합형 과학 교육이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고2 이후에 배우는 심화된 과학 과목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논술을 준비하는 학생에게는 사회현상을 과학적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배경지식을 길러주기 때문에 반드시 배워둬야 한다”고 얘기했다.

초·중생도 융합형 수업 준비

 이에 따른 초·중학생들의 학습법도 달라졌다. 여러 교과서에서 개별 지식을 습득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장 체험 등과 연계해 과목별로 다양한 지식을 넘나들 수 있게 유도하고 있다. 경기 조현초 박석만 교육기획부장은 “융합 교육에 대비해 현장 체험 학습을 강화했다”며 “교과서는 현장 학습을 위한 사전학습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지도한다”고 설명했다. ‘왕릉’에 대해 공부한다면 사회 교과서에서 역사적 배경을 익히고 과학 교과서를 통해 그 지역의 식생에 대해 공부하는 식이다. 박 부장은 “현장 체험 학습 한 곳을 다녀오려면 학생들은 적어도 2~3과목 교과서를 한꺼번에 펼쳐놓고 여러 단원을 넘나들며 예습을 해둬야 한다”고 말했다.

 박 부장은 “초등학교에서는 역사와 과학을 기준으로 삼아 융합 교육을 실시해야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고등학생은 쌓인 학습량이 많아 여러 과목을 병렬적으로 융합해도 스토리텔링이 가능하지만, 초등학생은 역사와 과학을 기준으로 삼은 뒤 나머지 과목을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선에서 융합 교육을 실시하는 편이 낫다는 말이다.

 독서와 체험을 통해 융합형 교육을 준비하는 초등학생과 달리 중학생들은 혼란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중학교 2학년 딸을 둔 박소원(42·서울 양천구)씨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융합형 교과서를 들이미는 것은 학생들에게 지나친 부담”이라고 불만을 털어놨다. 중학교에서 과학 기초 개념도 숙지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융합부터 시도한다는게 효과적이지 않다는 주장이다. 박씨는 “융합형 교육을 제대로 실시하고 있는 사교육업체도 찾기 힘들어 부모의 부담이 더욱 크다”며 “직접 아이를 지도하기 위해 평생교육원같은 곳에 다니며 공부하는 부모들도 많다”고 전했다.

 특목고 입시전문학원 에이피보스 신혜인대표는 “대학에서 융합형 인재를 원하기 때문에 융합형 교육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강조했다. 그는 “중학생 때는 조급하게 과목 간 융합을 시도하기보다는 개별 학문에 대한 기초 지식을 정확하게 쌓아주는 편이 낫다”고 설명했다.

[사진설명] 오남고등학교(경기 남양주시) 학생들이 융합형 과학 교과서로 공부하는 모습. 브레드보드와 LED를 이용해 ‘빛의 삼원색’을 알아보는 실험을 하고 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사진="김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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