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아는 걸 알려준다는 쾌감에 전파 속도 ‘초고속’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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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호 14면

자연히 잘못된 소문에 따른 폐해도 급증하는 추세다. 2008년은 루머의 해였다. 그해 벽두에 가수 나훈아씨는 괴담 수준으로 발전한 루머에 정면으로 맞섰다. 기자회견을 자청해 카리스마 넘치는 직설화법으로 자신을 겨냥하는 각종 루머를 종식시켰다. 그는 불행히도 거짓 소문의 마지막 피해자가 아니었다. 가을에는 배우 최진실씨가 사채 관련 루머로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사이 여름은 이른바 ‘촛불정국’으로 뜨거웠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온갖 부정확한 정보와 헛소문이 쏟아지며 정부에 반대하는 성난 민심을 자극했다.

루머의 세계

이후로도 비슷한 현상은 반복되는 중이다. 천안함 사건, 신종 플루 같은 이슈가 벌어질 때마다 각종 소문과 유언비어가 나도는 것은 물론이고 연예인의 결혼설·이혼설은 사흘이 멀다 하고 매체를 장식한다. 가수 타블로의 학력에 의혹을 제기하는 루머는 가입자 10만 명이 넘는 인터넷카페를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보기 드문 현상까지 벌어졌다.

고려대 조대엽(사회학과) 교수는 루머의 전파가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조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온갖 루머가 쏟아진 것 등을 예로 들며 “소문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합리적인 설명을 찾기 위한 노력”이라고 말했다. “소문이 보태지고 감해지면서 사실과 달라지기도 하지만 사실을 규명해 나가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루머의 양은 사안의 중요성과 모호함에 비례한다’는 1940년대 미국 심리학자 올포트와 포스트먼의 연구도 상기시켰다. 달리 말하면 중요한 이슈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때일수록 루머가 자랄 토양은 두터워진다. 에이즈·사스(SARS) 등의 신종 질병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또 미국에서 9·11 테러나 허리케인 카타리나 피해 직후에 루머가 쏟아진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올포트와 포스트먼 이후 최근까지 연구들은 루머의 신뢰성이 루머의 사실 여부와 별개의 문제라고 보고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니콜라스 디폰조는 루머에 대한 믿음을 증가시키는 요소로 루머를 듣는 사람의 태도와 일치할 때, 믿을 만한 출처에서 나왔을 때, 여러 번 반복해 접할 때, 루머에 대한 반박이 수반되지 않을 때 등으로 꼽는다. 예를 들어 특정인에 대한 부정적 소문은 지지자보다는 반대자에게 더 설득력을 발휘하기 쉽고, 소문을 여러 사람이 믿는다면 동조하는 사람도 더 늘어나기 쉽다는 것이다. 미국의 법학자 캐스 선스타인은 이런 현상을 ‘폭포 효과’ ‘집단 극단화’라는 용어로도 설명한다.

나쁜 소문은 좋은 소문보다 더 빨리 전파되는 경향도 있다. 서울대 곽금주(심리학과) 교수는 “부정적인 정보는 그에 대처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정보 가치가 더 높고 확산도 빠르다”고 말했다. 예컨대 “새로 부임하는 팀장이 ‘사람 좋다’는 소문보다는 ‘유독 깐깐하다’는 소문이 훨씬 빨리 퍼지는 것은 깐깐한 사람이라면 팀원들로서는 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문을 퍼뜨리는 심리를 두고 곽 교수는 “사람들이 ‘확실한 얘기는 아닌데’라고 운을 떼면서도 소문을 옮기는 데는 상대가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다는, 또 새로운 정보를 알려 준다는 쾌감이 작용한다”고 말했다. 또 자신과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데도 소문을 인터넷에 퍼 나르는 심리에 대해서는 “조회수·댓글 등 주목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곽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루머 전파에 대해 “정보통신기술은 크게 발달한 반면 우리 사회의 토론 문화·대화문화는 그에 못 미친다”고 진단했다.

한신대 윤평중(철학과) 교수는 루머와 관련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징 두 가지를 꼽았다. 그 하나는 “좁은 땅덩어리에 인구 밀도가 높을 뿐 아니라 초고속통신망·스마트폰 등의 인프라 역시 아주 촘촘하게 보급돼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저신뢰사회, 특히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사회”라는 점이다. 단적인 예가 올봄 특임장관실이 전국 성인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나온다. 이 조사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신뢰받고 있는 집단’을 묻는 질문에 ‘청와대’를 꼽은 응답자는 3.4%에 불과했다.

경찰(2.9%)·국회(2.9%) 등과 함께 최하위권이다. 2006년 한국개발원의 조사에서는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처음 보는 낯선 사람만도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에서 국민 1500명에게 10점 척도로 신뢰도를 물은 결과 정부는 3.3점,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은 4점으로 평가됐다. 윤 교수는 이런 결과에 대해 “우리 사회는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나 고위 공직자의 언행이 신뢰를 주지 못하는 역사를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소문을 소비하는 주체, 즉 우리 사회구성원 전반의 문제도 지적했다. “좋은 의미의 개인주의, 성숙하고 독립적인 시민으로서의 경험이 덜 축적돼 이슈에 대한 쏠림 현상이 심하다”며 “자신의 가치 판단이나 정치적 입장과 다르면 사실조차 다르게 채택하는 것은 굉장히 큰 문제”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윤 교수는 “사회적 신뢰, 공적 신뢰가 부족한 측면은 결국 기득권 세력이 솔선수범해 되살려야 하고, 사회 전체적으로도 사실과 합리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뿌리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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