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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정치에 앞선 인간적 과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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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라종일
한양대 석좌교수

‘통일’이 통일에 장애라고 한다면 말장난같이 들리겠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실적 추론’이라고 부르는 작업을 하는데 이것은 생각의 정리를 위해 과거에 어떤 일들이 ‘그런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식의 가정을 해 보는 것이다. 분단이 되었을 때 양측 정부가 각기 상대방을 통일 장애 세력으로 치부하고 어떻게 하든 자기 위주의 통일을 해야 한다는 식의 정책을 추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일단 분단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후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논의를 지속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방적 ‘통일’ 추구 때문에 분단이 더 고착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북한 정권은 일관되게 정치와 군사를 결합한 ‘통일’ 전략을 추구해온 반면 남한의 역대 정부들은 전혀 비현실적인 ‘북진 통일’이나 ‘유엔 감시하 총선거’ 같은 정책을 내세우곤 했다. 1970년대 들어서야 기능주의적 접근을 기본으로 하는 대북정책을 추진했는데 이것을 가장 잘 실현한 게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이었다.

 햇볕정책 결과 10년간에 걸쳐 한반도에는 전례 없는 활발한 교류와 협력이 이뤄졌다. 그런데도 통일은 차치하고 한반도에서 평화 정착의 전망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왜 그런가? 김 전 대통령의 진의가 어디에 있었든 간에 북한 정권으로서는 햇볕정책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햇볕’이라는 말의 어원 자체가 상대방의 외투를 벗기기 위한 전략적 구상을 암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김 전 대통령도 공개적인 경우를 포함해 수시로 “공산주의 정권은 외부에 노출되면 붕괴되고 만다”는 언급을 했다. 물론 이런 언급이 없었더라도 동구나 소련의 예도 있는 터에 북한 정권이 나름 대책 없이 여기에 응할 수는 없었다.

 필자는 햇볕정책의 구상 단계부터 이 정책의 전략적 측면을 암시하는 이솝 우화와의 관련을 버리고, 성서에서 근원을 찾자는 이야기를 한 일이 있다. 마태복음에 햇볕은 선인이나 악인을 구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골고루 비춘다는 구절이 있다. 말하자면 정치적 통일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구체적 혜택이 되는 통일을 추구한다는 이야기다. 우선은 남북을 합쳐 더 크고 강력한 나라를 이룩한다는 정치적 목표를 일단 접고, 남북 주민에게 모두 더 높은 생활의 질, 더 낳은 음식, 의료혜택, 교육의 기회 그리고 더 다양한 선택의 여지 같은, 작지만 구체적 필요들에 따르는 혜택을 제공하며, 조금이라도 덜 거짓말하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일을 하고 살 수 있는, 좀 더 높은 도덕적 차원을 구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어느 시기에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화합과 통일에 합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통일을 정치적 과제가 아닌 인간적 과제로 추구하자는 생각이다. 분단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나고 있는 시기, 이제는 통일에 관해 권력과 정치, 국가보다 현실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절실한 필요들을 중심으로 생각해 볼 수는 없는 것인가.

라종일 한양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