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준의 골프 다이어리 <30> 아일랜드에서 바람이 전해준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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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아일랜드 서쪽 해안의 라힌치라는 작은 시골 마을의 조그마한 펍에서다. 창밖에는 으르렁거리는 파도 소리와 함께 폭풍 같은 바람이 울어대고 있었다. 함께 맥주를 마시던 패드릭 매킨러니는 “이 정도는 산들바람(breeze)”이라고 했다. 그런 바람을 미풍이라고 부르는 그의 말에 마시던 기네스 맥주의 부드러운 거품이 생선가시처럼 갑자기 목에 탁 걸렸다.

매킨러니는 “바람은 골프 그 자체다. 나는 뒷바람이 불 때, 맞바람이 불 때, 옆바람이 불 때는 골프를 할 수 있지만 바람이 안 불면 골프를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아일랜드인 특유의 과장과 조크지만 전혀 틀린 말도 아니다.

그는 다음 날 시범을 보여줬다. 맞바람이 강하게 부는 홀에서 80야드를 남기고 9번 아이언으로 공을 높이 띄워 다음 홀 티잉그라운드까지 날아가게 했다. 그가 “돌아와”라고 소리치자 공은 하늘에서 뒷걸음질쳐 그린에 사뿐히 떨어졌다. 50대 중반인 매킨러니는 라힌치에서 자랐다. 어릴 적 부모가 일하러 나가면 2번 홀 그린 담장 너머에 있는 할머니 집에서 놀았다고 한다. 겨우내 마을 공터에 나가 자치기를 하던 옛날 한국의 아이들처럼 그는 바람 부는 링크스에서 공을 치며 컸다. 주니어 시절 서부 아일랜드 아마추어 골프 챔피언십에서 우승했고 라힌치 골프 링크스의 클럽 캡틴도 역임했다. 2002년 명문 클럽 대항전 대표선수로 한국에 와 나인브릿지 골프장에서 경기도 했다고 한다. 나인브릿지 김운용 대표와는 절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는 바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5번 홀에서는 공을 찾기도 어려울 정도로 깊은 러프가 자란 언덕으로 공을 쳤다. 신기하게도 공은 긴 러프를 뚫고 굴러 내려 핀 주위에 붙었다. 매킨러니는 “바람이 강하면 러프가 길어도 공이 내려온다”고 했다.

아일랜드를 여행 중이다. 2년 전 스코틀랜드에서 만난 골프 순례자들에게서 “진짜 최고의 골프장은 아일랜드에 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에 꼭 한번 와 보고 싶었다. 라힌치를 비롯해 발리뷰니언, 로열 카운티 다운, 올드 해드 등은 최고의 골프장이었다. 깎아지른 절벽과 웅장한 둔덕, 인간의 손이 거의 닿지 않은 자연스러움은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준다.

진지한 골퍼들은 “스코틀랜드가 골프를 만들었으나 신은 가장 완벽한 골프 코스를 아일랜드에게 줬다”면서 “아일랜드 바닷가 골프장은 천국의 링크스”라고 찬사를 보낸다. 역사나 주요 대회 개최, 접근성 등의 외적 요소를 제외하고 코스 그 자체로만 본다면 아일랜드 링크스들이 세계 최고 골프장을 석권할 것이라고 기자는 본다.

강풍은 논란이 될 수 있겠다. 평생 맞은 바람, 그 이상을 일주일여 동안 경험했다. 바람에 익숙하지 않은 미국인 여행자들이 너무 어렵다고 투덜대는 모습을 자주 봤다. 기자도 폭풍의 언덕에 서서 골프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여러 번 받았고 라운드 중간에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아일랜드 골프장은 소수의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좋아하고 대중은 싫어하는 컬트 영화 같은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행하면서 바람이 강한 곳일수록 멋진 골프장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유명 골프장 주변엔 유난히 절벽이 많다. 바람은 거센 파도를 일으켜 침식 작용을 활발하게 한다. 바람 많은 제주도에 절경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서유럽의 바닷바람은 웅장한 모래언덕(사구)을 만들어낸다.

이 글은 윌리엄 예이츠의 고향 슬라이고의 호텔에서 라운드 나가기 전 새벽에 쓰고 있다. 오늘도 역시 창밖에는 바람 소리가 흉흉하다. 오늘 또 어떤 고생을 할지 그림이 그려진다.

그러나 연을 날리는 것처럼 바람을 느끼는 매킨러니를 보면서 바람이 골프에 방해가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 바람도 골프의 일부라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148야드의 파 3에서 드라이버를 칠 때 자연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고, 뒷바람에 공을 실어 보낼 때의 짜릿함도 알게 됐다.

골프에 서서히 흥미를 잃고 있는 분들에게 아일랜드 링크스 투어를 권장한다. 이 곳의 강풍은 하드코어여서 아주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남길 것 같다. 기자는 반드시 이곳에 다시 오기로 마음먹었다. 

성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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