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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셰와 히틀러, 천재와 악마의 만남으로 탄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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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독일 볼프스부르크를 방문했다. 독일 중북부에 자리한 이 도시는 폴크스바겐의 고향이다. 울산시와 현대차 관계처럼 볼프스부르크 역시 폴크스바겐과 공동 운명체다. 본사와 공장, 폴크스바겐 아레나(축구장), 아우토슈타트(신차 출고장 겸 전시장), 직원주택이 모인 폴크스바겐의 도시다. 1937년 이 회사가 설립될 당시엔 도시의 이름마저 폴크스바겐이었다.

오늘날 볼프스부르크엔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도시의 명물로 떠오른 아우토슈타트 덕분이다. 첫 인상부터 범상치 않다. 빌딩처럼 우뚝 솟은 두 개의 유리 타워에 옥수수 알갱이처럼 신차가 빼곡히 박혀 있다. 차를 주문한 고객이 찾아오면 타워 안의 로봇 팔이 오르내리며 한 대씩 쏙쏙 빼서 내려준다. 관람용 로봇 팔을 타고 안을 둘러볼 수도 있다.

아우토슈타트는 폴크스바겐이 5000억원을 쏟아 부어 2000년 6월 1일 완성한 자동차 테마파크다. 칙칙하고 사무적인 신차 출고장 풍경을 바꾸기 위한 실험적 도전이었다. 축구장 35개 면적의 부지에 폴크스바겐 그룹 산하 주요 브랜드별로 추린 7개 전시관이 우뚝 섰다. 뮤지엄과 쇼핑몰, 레스토랑, 공연장까지 아우른 지역주민의 오붓한 쉼터이기도 하다.

아우토슈타트는 대충 둘러보는 데만 한나절이 걸린다. 볼거리가 웬만한 국제모터쇼 수준이다. 소형차부터 포악한 수퍼카, 저렴한 대중차부터 상위 1% 부자를 위한 최고급차까지 거느린 ‘자동차 왕국’답다. 특히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시설이 많다. 그래서 유독 가족단위 관람객이 많다. 특급 호텔도 갖춰 1박2일 이상의 관광코스로도 인기다.

전시관 사이엔 생태환경을 살린 공원을 조성했다. 잔잔하게 이어진 인공수로는 알고 보면 경사면을 거슬러 흐른다. 바지런히 깎은 잔디밭은 평지와 구릉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야생 토끼가 깡충깡충 어디론가 뛰어가고, 이름 모를 뚱뚱한 새가 뒤뚱거리며 연못으로 향한다. 운하 건너편에 시뻘건 쇳물 줄줄 흐르는 공장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게 된다.

그런데 더없이 평화로운 볼프스부르크 이면엔 독일의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비뚤어진 욕망과 강제이주 노동자의 한(恨), 경제기적의 희망이 뒤엉켰다. 지난 역사의 산증인 폴크스바겐은 꿋꿋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70여 년 전 붉은 벽돌로 만든 발전소는 지금껏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회사 이름 또한 알파벳 한 글자 안 바뀐 폴크스바겐 그대로다.

폴크스바겐은 독일어로 ‘국민차’란 뜻이다. 37년 독일의 국민차를 만들기 위해 설립됐다. 이 회사가 39년 내놓은 첫 차가 바로 ‘비틀(딱정벌레)’이었다. 국민차 한 차종으로 출발한 폴크스바겐은 오늘날 아우디와 벤틀리, 람보르기니, 포르셰, 스카니아 등 11개 브랜드를 거느린 유럽 최대 자동차 그룹으로 거듭났다. 지난해 판매는 714만 대로 세계 4위였다.

페르디난트 포르셰

‘비틀’은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자동차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던 페르디난트 포르셰와 당시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합작품이었다. 훗날 ‘천재와 악마의 악수’로 회자된 만남이었다. 그 즈음 독일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경제는 형편없이 쪼그라들었다. 승전국은 독일 산업의 숨통을 바짝 조였다. 실업률이 급증했다. 가난이 곧 일상이었다.

히틀러는 자동차에서 기회를 찾았다. 고속도로(아우토반)를 닦아 고용을 창출했다. 아울러 국민차 계획을 선포했다. 팍팍해진 삶에 지친 독일인을 회유할 묘안이었다. 히틀러는 국민차에 깐깐한 조건을 못 박았다. 어른 둘과 아이 셋, 얼마간의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 심지어 최고속도와 연비까지 엄격하게 요구했다.

결정적으로 가격을 1000마르크 이하로 맞춰야 했다. 당시 기술수준과 원자재 가격으론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 하지만 천재 엔지니어로 이름 날리던 포르셰에겐 도전해볼 만한 숙제였다. 그는 당대 뛰어난 고성능차를 여럿 설계한 귀재였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대중을 위한 소형차를 만들고 싶어 했다. 순박한 기술자의 꿈은 독재자를 만나 현실로 꽃피게 됐다.

38년 5월 26일 볼프스부르크가 철십자 깃발로 뒤덮였다. 휴고 보스가 디자인한 제복을 입은 나치 친위대가 도열했다. ‘1가구 1차 시대’를 열 국민차 발표식이 열리던 날이었다. 히틀러는 큰소리쳤다. “전 국민이 모터사이클 값으로 차를 살 수 있게 됐다”고. 하지만 그는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렸다. 공장 완공 직후인 이듬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이다.

내 차를 염원하던 독일인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국민차는 수륙양용의 사륜구동 군용차로 개조돼 전장에 투입됐다. 45년 참혹한 전쟁이 끝나고서야 ‘비틀’은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했다. ‘비틀’을 독일 우물 안에서 벗어나게 한 주인공은 한때 총부리를 겨눴던 미군이었다. 폴크스바겐 공장 또한 대량생산의 달인 미국 포드의 아이디어를 차용해 지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그뿐만이 아니다. 나치에 협력한 혐의로 포르셰는 프랑스군에게 끌려갔고, 아버지의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들 페리는 스포츠카를 개발해 오늘날 포르셰의 기초를 닦았다. 납작한 수평대향 엔진을 꽁무니에 얹는 포르셰 911의 전통은 ‘비틀’ 설계에서 따온 것이다. 폴크스바겐은 포르셰를 2009년 인수했다.

이날 볼프스부르크에서 지난날의 ‘비틀’을 살펴봤다. 우편배달차·경찰차·소방차·승합차 등 각양각색 ‘비틀’이 가득했다. 폴크스바겐 클래식 센터의 에버하르트 키틀러(56) 관장은 “비틀은 자동차 디자인의 아이콘인 동시에 폴크스바겐의 영혼과 같은 존재다. 아울러 독일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자동차 대중화를 이끈 주역”이라고 설명했다.

원조 ‘비틀’은 단일 차종으로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 39년 데뷔 이후 멕시코의 폴크스바겐 공장으로 거점을 옮겨 2003년까지 2100만 대 생산됐다. 그런데 이 차의 공식이름은 한 번도 ‘비틀’이었던 적이 없다. 1100, 1200 등 숫자로 이름을 대신했다. 그러나 세계 각지에서 ‘딱정벌레’란 뜻의 애칭으로 불렸다. 가령 독일어권에선 ‘캐퍼’, 영어권에서는 ‘비틀’이었다. 원조 ‘비틀’이 생산되는 가운데 98년 ‘뉴 비틀’이 데뷔하면서 애정 어린 별명은 정식 이름으로 거듭났다. 

볼프스부르크(독일)=김기범 중앙SUNDAY 객원기자 kb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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